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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 이종암 · 엄순봉 · 이강훈 지사 67 한 옥고를 치렀고, 두 분이 끝내 순국하였다. 살펴본 대로 이종암 지사 는 1919년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고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 다. 이강훈 지사는 약관 10 대 때 독립운동에 뜻을 품 고 고향을 떠나 북간도와 상해 방면에서 여러 경험 을 쌓고 교육계몽운동과 주 민자치 부문에 주력하다 운 동정세의 급변을 자각했고, 상해로 가서 아나키스트 대 오에 합류해 ‘직접행동’의 최전선으로 자진해 나아 간 이였다. 그리고 엄순봉 지사는 농사를 짓다 만주 로 가서 독립운동의 장으로 진입했고, 1930년대 초 에 상해로 옮겨가서는 밀정과 친일분자를 응징하는 아나키스트 활동의 선봉에 섰다. 이강훈과 엄순봉이 취해간 ‘아나키스트 직접행동’의 대상은 이종암의 의 열단이 지목했던 ‘7가살’처럼 일제 요인과 친일-반민 족 패류(悖類)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거사 시도와 활동은 반제투쟁과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의미가 컸고, 확실히 의열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열투쟁에는 당사자의 희생이 자주 뒤따르곤 했 다. 성사되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거나 중도에 좌절 된 거사 시도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실패’로 단언할 수만은 없다. 성공한 거사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실패했 거나 좌절되었을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가 찾고 배울 것은 많다. 성패를 돌아보지 않고 의열투쟁의 전선에 나 선 의사들은 아나키즘적 논법으로 말해보면 ‘행동에 의한 선전’의 선봉대였다. 동족 내의 불의한 존재를 응징하고 숙청하였으며, 일제의 흉계를 폭로하고 그 획책하는 바를 저지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극대로 표출해내며, 주체적 민족운동의 기세를 드높 여 일제에 경종을 울리는 등 모두가 ‘행동에 의한 선 전 · 격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행동 속에서 아나키스트 의열투사들은 자유와 정의를 향한 끝없 는 집념, 불굴의 투쟁의지, 뜨거운 동지애와 고결한 희생정신을 나타내 보여준 것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20년 3월 경 폭탄 구입차 상해에 간 의열단 원들. 오른쪽부터 김원봉 · 강세우 · 곽재기 · 김 기득 · 이성우. 앉은이는 정이소, 하단은 이듬해 입단하는 김익상(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년 12월 1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의 열단 100주년 기념으로 공연된 뮤지컬 ‘의열 단 아리랑’ 포스터(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