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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 유만수 · 강윤국 선생 67 서상한의 도움으로 1944년 11월 조문 기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박춘금(朴春琴) 등 친일 거 두를 처단하기 위해 조문기, 강윤국, 우동학, 권준 등과 함께 1945년 3월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으 로 있던 인물들로서 대한애국청년당은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인연을 맺은 인 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유만수와 조문기가 일본에서 귀국하기 직전 수립했던 독 립운동 계획에 따른 것으로, 귀국 이후 동지 규합, 비밀단체 구성, 친일 거두와 침략 원흉 처단, 중국행이라는 4단계 계 획이었다. 유만수는 대한애국청년당의 임시의장에 추대되었고, 바로 이 대한 애국청년당이 조직 후 처음이자 마지막 으로 행한 의거가 부민관폭파의거였다. 이 의거에 사용할 다이너마이터를 구 하기 위해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장에 취직하여 매일같이 소량의 다 이너마이트를 빼왔고, 10여일 후에는 뇌관 2개를 반 출하여 이를 시한폭탄으로 제작하여 의거 당일에 사 용하였다. 강윤국의 활동 강윤국 의사는 1926년 9월 28일 서울 중림동에 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이며 강백(康伯)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부민관폭파의거의 또 다른 주역 인 조문기의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에는 강 윤 국이 국수공장을 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경 제적인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고 되어 있다. 호탕한 성격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적인 성향 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고등교육 을 받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견습공 모집 공고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했다고 한 다. 일본 생활을 통해 그는 일본은 “전쟁 물자를 만 1950년대 부민관(현재 서울시 의회) 전경 현재 서울시 의회 앞에 세워진 ‘부민관 폭파 의거 터’ 표지판(서울경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