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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영월엄씨대종회보 43호 녕 선생 중매로 상해로 함께 망명한 연병호공(延秉昊公)의 따님이신 곡산 연미당(谷山 延薇堂 )과 재 혼하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다. 한동안 상해임정의 독립운동은 침체되다가,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李奉昌義士)의 동 경 일 황에 대한 폭탄투척, 이해 4월 29일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의 상해홍구공원의거(上海虹口 公園義 擧), 1933년 3월 17일 백정기의사(白貞基義士)의 반역도 사살 등으로 점차 활기를 되찾게 되 었다. 이중 윤의사 의거 당시 항섭공은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에 취임하여 백범 선생을 보좌하 며 독 립당 선전부장(獨立黨宣傳部長)을 맡으셨고 윤봉길 의거(義擧) 뒷수습에 협력하셨다. 한편 항 섭공 은 임시정부 서무부장을 맡고 임정이 상해를 항주(杭州), 가흥(嘉興), 진강(鎭江), 남경(南京 ) 등지 로 분산될 때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고, 1937년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1) 노구교는 북경 서남쪽 151km에 위치한 다리이다. 이 사건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는 사건으로 7.7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발생하여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새로운 용기를 갖고 항전 의지를 불태우셨다. 이때 백범 선생을 중심으로 엄항섭, 조완구(趙婉九), 이동녕(李東寧), 송병조(宋秉祚), 차이석(車利 錫), 안경근(安敬根) 선생 등이 결속하셨다. 1938년 5월 장사 조선혁명당(長沙朝鮮革命黨) 본부에 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통합논의 중 조선혁명당 계열의 이운한(李雲漢) 의 총격으로 현익철(玄益哲)이 사망하고 백범 선생이 부상당했을 때도 항섭공은 백범선생을 극진 히 돌보셨다 한다. 일제가 패망하자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제1진이 환국할 때 김구주석, 조 완구 등과 함께 항섭공은 백범 선생을 보좌하였으며 문필에 뛰어나 김구 주석 명의의 발표문과 대 국민 호소문 등은 거의 항섭공이 기초(起草)하셨다. 고국에 돌아온 후 항섭공은 한국독립당 선전부 장을 역임하였으며 1946년 2월 개최된 우익진영을 망라하는 반탁운동기구(反託運動機構)인 비상 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에서도 선전위원장에 선임되셨다. 그리고, 1947년 3월 국민회의 전국대표 대회의 임시정부 확대 강화에 따른 정무위원 개편에서도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에 임명되셨다. 한편 항섭공은 환국 후인 1946년 6월 타불로이드 2면제 민주일보(民主日報)를 창간하고 명예사 장 김규식(金奎植), 발행인 김인식(金寅植), 편집인 이헌구(李軒九), 김광섭(金珖燮), 오종식(吳宗植), 신경순(申敬淳), 안석주(安碩柱) 등과 함께 일했으며 한때는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의 좌 1) 노구교는 북경 서남쪽 151km에 위치한 다리이다. 이 사건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는 사건으로 7.7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