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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1월의 독립운동가 체포 직후 그의 심경을 토로한 시 한 수가 전한다.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한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아직도 한 가닥 목숨 남아 있으니 푸른 하늘에 부 끄럽네 장부가 이제 죽을 곳을 알았으니 은나라에 백이숙제(伯夷叔齊) 있고, 제나라에 전횡 (田橫)이 있었네. 대동창의단의 선봉장 정원집 정원집(鄭元執/鄭元集, 1877-1909) 서울 중서(中 暑) 전동에 살았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다. 평 리원의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1907년 음력 9월 10일 중서 전동에 사는 이봉래(李鳳來)와 함께 경 기도 광주의 정철하(鄭喆夏) 의진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벌이다 귀가하였다. 이봉래 역 시 정원집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들은 내란죄 명목으로 10년 유배형을 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당시 이봉래의 직업은 고용(雇傭)이었고, 정원집은 퇴병(退兵), 즉 해산 군인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군대해산 당시 의병 봉기에 가담했다가 서울을 벗어나 경 기도 광주의 정철화 의병에 참여한 것 같다. 판결 문에는 정철하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정철화(鄭 哲和)가 정확한 이름이다. 정철화는 방인관 의병 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방인관은 서울진공작 전을 주도한 13도창의대진소에서 평안도를 대표 한 의병장으로,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금광 광 부 출신이었다. 정원집과 이봉래는 13도창의대진소의 방인관 의진 소속인 정철화 의병부대에서 일시 활동하다가 귀가한 후 체포되었다. 이들은 1907년 11월 평리원 에서 10년 유배형을 받아 다음 달 전남 지도에 유배 되었다. 한편, 판결문에 의하면 정철화는 경기도 용 인의 유생 출신으로 1907년 음력 7월경 여주에서 방 인관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서기로 활동하며 14명의 의병을 거느렸는데, 정원집과 이봉래도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철화는 음력 9월 15일경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서 살다가 1908년 초 일본군 사령부 에 체포되었다. 그는 내란죄 명목으로 15년 유배형 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1909년 진도의 유 배지를 탈출하여 다시 의병으로 활동했으며, 1912 정원집이 선봉장으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전해산 의병장(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