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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4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9월의 독립운동가 조시원과 함께 최전방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여 총 무처에서 임무를맡았다. 이때 함께 파견나간 안춘생 과는 이후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1942년 4월 한 국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 2분대원이 된 그는 구대 장 안춘생과 함께 적 점령 지구에 있는 한국인 청년 과 일본군 포로 등을 포섭하여 대적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는 여성 광복군의 상징적 존재이자, 광복군 이 맺어준 부부 독립운동가로 대표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찬익 · 신건식의 대중(對中)외교 가업을 한국광복 군으로 승화시킨 박영준-신순호 박영준은 1915년 11월 만주 롱징(龍井) 난다라즈 (南大辣子)에서 박찬익(朴贊翊)의 3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박찬익은 대종교와 연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 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있었 고,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외무차장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맡아 주로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때 문 에 박영준은 1932년까지 부친과 떨어져 지내야 했 으나, 중학 진학을 앞두고 상하이에 건너와 5남매 중 유일하게 부친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임시정부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다녀야 했으며, 대중 외교를 책임지던 박찬익은 국민정부와의 교섭 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이로 인해 박영준 은 난징, 자싱(嘉興), 광둥(廣東) 등지의 학교를 다녀 야 했다. 1937년 11월 말 상하이를 떠난 그는 후난성(湖南 省) 창사(長沙)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8년 에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항일선전 활동을 전개하였 다. 1939년 10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이 된 그 는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고취하고 한중 협력을 강화 하기 위한 항일예술, 문화활동을 벌였다. 11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여, 1941년 12월 제17기로 졸업했다. 군관학교 시절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기념 사진(1939.11.17). 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박영준, 세번째 박찬익(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45권) 한국주화대표단 본부(난징)에서의 모습(중앙 박찬익, 왼쪽 두번 째 박영준, 출처 『민필호전기』. 나남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