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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4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 뒤 독립운동계 초미의 관심 속에 1923 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자 김 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였 다. 이 때 그는 임시정부 법통성의 고수와 유 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다만 각원(閣員) 개선 등 개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기 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로 나뉘 어 논쟁을 거듭하였다. 기대와는 달리 국민대 표회의는 독립운동 여러 세력의 화합과 통합 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후유증만 남긴 채 끝나 고 말았다. 미국 유학 중 근화회 조직 이같은 독립운동계의 분열에 실망한 김 마리아는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 고, 1923년 6월 21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 를 떠나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11일 미국 로 스엔젤레스에 도착하여 안창호의 부인 이혜 련의 도움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 뒤 1924년 9월 미국 미네소타주 파크빌시에 있 는 파크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의 수업을 마 치고, 다시 1928년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하였다. 여기에서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 며 학부과정과 연구과정을 마친 끝에 1929년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고학 생활 중에도 조국 독립 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8년 2월 12일 황애덕·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김마리아의 1927년 파크대학 졸업 기념사진 (연합뉴스 제공)  미국 유학시절의 김마리아. 김마리아가 사진에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Maria C. Kim.’이라는  서명의 중간이름에 해당하는 C는 Chinsang의  첫 글자이다. 박용옥 교수(전 성신여대)는 김마 리아의 개명 전 이름이 진상 또는 상진이라고  추정했다(김마리아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