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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베트남) 참전배경. 월남전쟁은 1964.8.2과 8.4일 동낑만 공해상에 정박중인 미군함정을 월맹의 어뢰정 공격으로 인하여, 8.5일자 미국이 항공모함을 급파하여 월맹의 유류 저장고를 집중 폭격한 "통킹만사건"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우리 주월 한국군은 건국이래 최초의 해외 파병으로 목적은 당시 미국과의 안보동맹체제를 강화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함과 동시 월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체제 수호와, 공동방위 체제로써의 신의 를 준수함은 물론 한국의 6.25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우방 16개국에 대한 보답일 뿐만 아니라 "보릿고개"로 회자되던 경제적 어려움을 시급히 해소하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파병을 국가전략으로 선택해 안보와 경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파병조건으로 1. 파병병력의 소요경비를 미국이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이루어 졌다. 우리 한국의 파병은(1964.5.9 ~ 1973.4.3) 미국 존슨정부의 지원요청으로 시작된 제1차 1964.9.11 비전투부대인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 파병, 제2차 1965.3.10 건설지원단(비불기부대) 제3차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를 1965.10.9 수도사단(맹호부대)을 1965.11.1.에 파병하면서, 1965.10.20 사이공(호치민)에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립 월남전쟁에 본격적인 작전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제4차 파병은 1966.10.8 제9사단(백마부대)이 닌 호아 지역에 주둔하므로써 남베트남 중부해안의 핵심지역에서 미군과 함께 전쟁의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다. 제9사단의 파병에 따라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예하부대의 전투지원을 위해 수도사단 예하의 군수지원사령부를 모체로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를 창설하고, 해상 수송지원을 위해 비둘기 부대의 예하 해군수송분대를 해군수송전대(백구부대)로 개편하였으며, 근접항공지원및 공중수송지원을 위한 공중지원단(은매부대)를 창설하여 명실공히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케 되어 용병이란 불명예를 불식시킨 단초를 마련하였다. 우리 주월한국군은, 이역만리 전쟁터 이름 모를 산야에서 꽃다운 젊음을 산화시킨 30여만명의 참전자와 5천여명의 선사자 10마여명의 부상자들은, 분명 한국군에게 자주국방의 의지와 전투경험을 갖게하여 세계적 강군으로 자리매김함과 조국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노라. 오늘 준공케 된 '호국참전유공자비'는 전쟁사를 접하기 어려운 전후 새대들에게 전쟁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함은 물론 관심과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월남전쟁과 한국군의 파병이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과 생생한 역사적 교훈을 확인하여, 미래를 위한 "유비무환"의 대비태세를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