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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씨대종회보 43호 43 주필공과 함께 재러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셨다. 이 에 일 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신한촌 공격에 이어 니콜스크에서 일본 헌병들이 파견 보병대의 지원 을 받아 4월 5일, 6일 양일에 걸쳐서 동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가의 집을 수색하고 공을 포함 한 78 명을 체포하여 취조하였다. 당시 체포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 이외에 최재형, 김이직, 황경섭 등을 들 수 있다. 일본군 은 체 포한 78명 중 공 등 4명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석방하였다. 공은 1920년 4월 7일 동 지역 주둔 흑룡 헌병대본부(黑龍憲兵隊本部)와 니콜스크 헌병분대(憲兵分隊)가 부대의 건물을 옮기자 오 후 6 시경 호송 중 감수인(監守人)의 틈을 엿보아 탈출을 시도하셨으나 일본군의 추적으로 피살 순 국하 였다. 정부에서는 주필공의 독립운동으로 순국한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 서하였다. 항섭공(恒燮)은 28세손으로 남한 정부와 북측이 다함께 기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항 일운 동가이다. 공은 1898년 9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승지를 지내신 아버님 주완공 (柱完 公)과 참판을 지내신 규식공(奎軾公)의 따님이신 숙부인 청풍 김씨와의 사이에서 나셨다. 다른 이름 대위(大衛), 자는 군상(君常), 호는 일파(一波). 구한말 개화파로 농상공 대신을 지내신 세영공 (世永 公)의 둘째 손자인 항섭공은 일찍부터 신학문을 익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봄에 보성 전문학교 상과(普成專門學校 商科)를 졸업하셨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9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부참사(法部 叅 事)가 되시고, 의정원의원(議政院議員)으 로 활 동하는 한편 1922년 11월 중국 절강성 항주에 있는 지강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하셨다. 상해 로 다 시 돌아온 항섭공은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 이 되셨다 한다. 치외법권을 가진 프랑스영사관 상무국(商務局)에 근무한 항섭공은 일제의 독 립운 동가 체포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다. 또한 항섭공은 프랑스 영사관에서 받은 월급 중에서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백범 김구(白 凡 金 九) 선생 등의 생활비를 지원하셨다 한다. 공은 1924년 상해 한인청년동맹 발기인, 집행위원 , 재정 부장, 임시정부 후원회위원 등을 겸임하셨으며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주관하는 공평사(公平 社) 감 사를 지내셨다. 부인 풍천 임씨는 1926년 6월 중국 상해에서 작고하셨으며, 1927년 30세 때 이동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독립 유공자 편 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