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page
5월의 독립운동 • 근우회 창립 65 가담했다. 근화여학교의 차미리사, 양현여학교의 신 알벳트와 경성 시내 여학교 교사들이 참여했다. 그 런데 발기인 대부분은 일본, 미국, 중국에 유학한 경 험을 갖고 있었다. 즉 해외 유학이라는 공통의 경험 이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의 연대를 가능케 한 토대 가 되었다. 발기총회에서는 ‘근우회(槿友會)’라는 단체명과 함 께 다음과 같은 강령을 확정했다. -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 -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함 발기총회 이후 근우회 창립준비위원회는 모두 4 차례의 회의를 통해 창립대회를 준비하면서 “일어나 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 자매들아! 미 래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끝을 맺는 「근우회 창립 취지서」를 마련했다. 마침내 1927년 5월 27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 에서 150여 명의 회원을 포함해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날 중앙집행위 원으로 21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창립대회 직 후인 5월 29일에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각 부 서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중 기독교계 여성 운동가가 8명,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가 10명이었 고 지도부인 상무집행위원이 7명 선출되었다. 근우회는 창립대회를 마치고 한 달 후인 6월 17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명의 회원과 500 「근우회 강령 및 규약」 (독립기념관 제공) 1927년 5월 27일 근우회 창립총회 광경 (『조선일보』 1927.5.29.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