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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 • 신간회의 창립과 활동 65 1923년 가을부터 동아일보사와 천도교의 일부 간 부들이 주도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연정회(硏 政會)라는 단체를 조직하려 했다. 1924년이 되자마 자 『동아일보』 지상에 이광수가 집필한 사설 「민족 적 경륜」이 무려 5회(1924.1.2~6)에 걸쳐 연재된 사 실도 이러한 동향의 하나였다. 사설의 핵심인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구절은 자치운동을 뜻했다. 「민 족적 경륜」에 반응이 극도로 좋지 않자, 연정회를 조 직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가, 1926년 9월 무렵 다 시 등장했다. 이 움직임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전 경성일보사 사장으로 사이토 총독의 언론통제와 정치담당 참모)와 연결되어 일어났다. 이른바 ‘자치운동’이라고 불렸던 노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현 단계에서는 조선인만의 자력(自 力)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고 식민지 조선의 자치권(自治權)을 획 득하자. 군사 · 외교 등을 제외하고 조선총독 아래 조 선의회를 따로 설치하여 조선의 자치 구역을 확보하 자. 이렇게 내정(內政)의 독립부터 달성하여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는 실력을 양성하자. 이 같은 자치운동에 반대하여 완전한 독립(절 대 독립)을 추구하는 반(反)자치론 · 절대독립론을 유지 하면서, 노동 · 농민 운동을 인정하여 사회주의자와도 협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 세력도 있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자치운동 세력을 ‘타협적 민족주 의’ 또는 ‘민족주의 우파’, 반자치 · 절대독립론을 내 세우는 세력을 ‘비(非)타협적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 의 좌파’로 분류한다. 신간회가 창립되는 배경과 계기는 바로 조선총독 부와 연계하여 자치운동이 다시 추진되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안재홍 등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좌 익(左翼)’을 자처하면서, 자치운동 세력을 ‘타협적’ · ‘ 우경적(右傾的) 세력’이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927년 1월 19일 28인의 발기인(발기인의 숫자는 27명 또 는 34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명의로, ‘우경 사상’인 자치운동을 배격하는 ‘순(純)민족주의’ 단체로서 신 간회의 발기인 대회를 마치고 강령을 발표하였다. 신간회는 원래 명칭을 신한회(新韓會)로 정했으나, 조선총독부가 ‘한’(韓)자를 트집 잡아 허가하지 않 았다. 그러자 옛날에는 ‘한’(韓)과 ‘간’(幹)이 같은 뜻 신간회 창립대회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1927.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