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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 • 국채보상운동 65 었다. 2월 24일 다시 대구금 연상채회는 북후정에서 연설 회를 개최하고 의연금을 모 았다. 그러나 대구경찰서에 서 파견된 순사는 연설하는 금연상채회 회원을 연행하고 해산을 요구하며 위협하였 다. 대구금연상채회는 대표 서상하·도정호·이근영을 관 찰부에 파견하여 국채보상취 지서와 규칙을 제출하며 교 섭을 벌였다. 북후정 민중대회가 개최된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보도했고, 다 음날인 22일에는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 되었으며, 뒤이어 23일에는 대구에서 남일동패물폐 지부인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 각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층 대구금연상채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서상돈을 비 롯한 대구광문사 계열의 상인들이었다. 대구금연상 채회는 대구광학회 계열의 전 경주 군수 이현주가 회장을 맡았으며, 대구광문사 계열의 정재학이 부회 장, 정규옥이 총무, 그리고 경상북도 시찰을 역임하 였던 전 경주 군수 김병순(본명 김윤란)이 서상돈과 함께 재무를 맡았다. 대구지역의 유력 상인층은 정부의 조세징수 과정 에서 세금대납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대구광문사 를 주도한 서상돈을 비롯하여 정규옥 · 정재학 · 김병 순 · 정해붕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서상돈 은 1895년 탁지부의 세무 시찰관, 1903년 내장원의 경 상남북도 검세관, 1903년 11월 김병순 등과 함께 징 세장(徵稅長), 같은 해 12월 최영달과 함께 경상남도 시찰관으로 세금대납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 다. 이때 김광제는 동래 경무관을 거쳐 삼남찰리사 로 있었다. 서상돈 · 정규옥 · 서병오 · 정재학 · 서상하 · 이장우 · 이 일우 · 최만달 · 최대림 · 박기돈 · 이종면 등 신흥 자본가 세력은 대한제국기 대구지방의 사회적 주도권을 장 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1906년 1월 대구광문사와 1906년 8월 대구광학회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전 개하였고, 자치기관인 인민대의소와 대구시의소를 설립하여 민권의 신장과 민중 의식의 성장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06년 1월 사범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 인이나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 여하였다. 경북관찰사 서리 참사관 백남준의 「보고서」에 첨부된 「민의소(民議所) 규칙」(왼쪽)과 「금 연상채회 임원록기(任員錄記)」(『경상남북도 래거안(來去案)』, 1907.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