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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마리아 선생 65 였고,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 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략으로 비밀리 에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벌여 그 해 11 월까지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 달하는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 신으로 11월 28일 선생을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 찰국으로 압송되었다. 그 뒤 대구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황애덕과 함께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이 일제의 고문과 악형을 당하여 병보 석으로 1920년 5월 22일 출감한 뒤, 세브란 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중국 망 명을 계획하였다. 결국 1921년 7월 10일 동 지들의 도움을 받아 인천에서 배편으로 탈출 하여 약 1개월 간의 여행 끝에 8월 초 중국 상 해(上海)에 도착하였다.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약 그는 상해에서 서병호의 부인인 큰 고모 김 구례(金求禮)와 셋째 고모인 김순애의 도움으 로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면서 건강 회복에 주 력하였다. 그리고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남경(南京)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상해의 대한애국부인 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 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 호는 노동국 총판을 사퇴한 날인 1921년 5월 12일 상해 3·1당에서 열린 유호(留 滬 , 상해) 동포연설회에서 임시정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 기하고, 그 촉성기관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 를 발기하였다. 나아가 그 해 6월 6일 정식으 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출범시켜 본격적으 김마리아 탈주 사건을 자세히 소개한 동아일보(1925.8.15). 동아일보는 김마 리아의 근황을 묻는 독자의 요구에 답하는 형식으로 「김마리아 조선 탈주 전 말」이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실었다(이상 김학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