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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원국 · 김원범 의병장 65 일제는 1908년 1월 24일부터 15개 부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의병 탄압 작전을 전개하 였다. 한편, 김준 의병진은 일본군 광주수비 대장 요시다 카츠사부로[吉田勝三郞] 소좌의 군사 작전에 쫓기게 되었다. 김준 의병진은 1908년 2월 2일 창평현 지곡(芝谷)을 거쳐 무동촌(茂洞村)에 주둔했다. 요시다 카츠사부 로는 군대를 이끌고 무동촌 마을로 진격하였 다. 이에 집중 사격을 하여 요시다 카츠사부 로 소좌와 부하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장성군 토천(土泉)과 영광군 낭월산에서 일본 군을 만나 교전하였다. 1908년 3월 21일 장성군 광곡(廣谷)에서 1908년 3월 25일에는 광산군 어등산(魚登 山)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4월 25일 김준이 순국하자 김원국은 다시 독자적 의진 을 이끌고 나와 재편하였다. 1908년 7월 전 해산 의병장과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조 직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9월 전라남도 광주 선암시장에서 동생인 김원범 이 도포장(都砲將)으로 활동한 조경환 의병부 대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1909년 1월 중순까지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영광, 함평, 장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나, 조경환 이 순국하고 동생 김원범도 전사하였다. 김원국은 1909년 2월 19일 조직을 개편 하여 자신이 대장이 되고, 선봉장에 곽진일 (郭鎭一), 중군장에 오덕신(吳德信) 등을 임명 하였다. 이 때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나 주군 송치(松峙)에서, 1909년 3월에는 장성 군 남일면에서, 1909년 4월 2일 곡성군 오산 면에서, 1909년 5월 19일에는 영광군 불갑 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원국은 전투 중 부상으로 곽진일에 게 부대를 위임하였다. 이후 1909년 6월 10 일 전라남도 광주군 우산면 본촌에서 은신하 1909년 일본군의 의병 탄압에 끝까지 항거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들.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원국 의병장(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