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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류인식 선생 65 극 지원하였다. 그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 는 조짐은 「차야한십절(此夜寒十絶)」이란 시 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독립운 동가들과 함께 상인, 노동자들도 일본제국주 의 억압의 사슬을 끊고 일어나야 할 해방운 동의 주체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는 노동 운동에도 관여했는데, 곧 조선노동공제회 안 동지회의 설립이 그것이다. 1920년 9월 창 립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의 간부와 회 원들은 대부분 협동학교 졸업생으로서 안동 청년회를 이끌던 인물들이거나, 직접 제자는 아니더라도 그와 교유하던 인물들이 대부분 이었다. 류인식이 전개한 마지막 민족운동은 1927 년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될 때 초대 회장으 로 추대되어 활동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이며 서거하기 1년 전의 일이다. 류인식 이 신간회 지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는 것 은 그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세력을 아 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위상을 보여주 는 동시에, 말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 을 지녔음을 알려준다. 예안 초유의 성대한 장례 1927년 겨울 류인식은 병으로 몸져누웠 다. 이듬해 들어 병세가 위중해지자 정현모 등 신간회 지회와 안동 청년단체 대표들이 그 의 집에서 대기하였다. 1928년 4월 29일 아 침 그는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이 날 오후 10시 25분 세상을 떴다. 당시 『동아 일보』 · 『조선일보』 · 『중외일보』 등은 일제히 그의 사거를 보도하며 애통해하였다. 안동의 각 사회단체들은 비통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준비에 분주하였다. 이 때 일 제가 돌연 사회장 불허 통보를 하였다. 신간 회장마저도 안 된다고 불허하자 하는 수 없이 보통의 장례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류인식 서거 기사(『동아일보』 1928.5.4) 류인식 장례 행렬(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