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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기탁 선생 65 휘·이동녕·이갑·유동열·안창호 등 7인이었다. 비밀결사 신민회 결성, 전국 조직화 당시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 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으며 국내 의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가 있었다. 신 민회의 총감독은 그가 맡고, 총서기에 이동 녕, 재무에 전덕기, 집행은 안창호가 담당했 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두 고 지방지국을 연락망으로 구성했으며 조직 을 도, 군, 반단위까지 점조직으로 세포조직 화하여 누가 회원인지 모르게 하였다. 창건 위원들은 신민회 창립 후 자신의 영향력 범 위 안에 있는 인사들을 가입시켜, 1910년 경 에는 약 800명의 회원으로 증가하였다. 1909년 봄 의병들의 항일투쟁이 쇠퇴해질 무렵 신민회는 국외 독립군기지와 독립군 창 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하여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 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절호의 기회를 포착, 국내 진입작전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 전쟁전략’을 채택하였다. 또한 그 실천을 위 해 1910년 8월 자신이 직접 독립군기지를 물 색하기 위해 만주(중국 동북지방)를 답사했 으며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이회영 등을 출발시켜 나중에 신흥학교를 설립하기에 이 르렀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제 당국은 황해도에서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모금사 건’과 연계하여 1911년 1월 ‘안악사건’(安岳 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을 조작 하였다. 이후 양기탁을 포함하여 16명의 신 민회 중앙 간부들을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투옥, 유배, 탈출, 항일, 투옥, 탈출, 무장투 쟁… 뒤이어 일제는 같은 해 9월 소위 ‘데라우 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일명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전국 신민회 회원 중 105인을 투옥시켰다. 양기탁은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징역 6년 이 확정되어 4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다 1915 년 12월 하순 석방된 후 평남 강서군 신경리 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916년 그곳을 탈출 하여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 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중국 천진(天津)에서 다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918년 12월 고 국으로 압송되어 전남 거금도에 2년간 유배 되었다. 1919년 12월 유배가 풀려 상경하였 으며,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유 근(柳瑾)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 일행이 서울에 왔을 때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독립 만세운동을 추진하려다가 다시 경찰에 붙잡 혀 투옥되었다.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어 머니가 사망하자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일시 방면된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만주로 탈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