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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서로군정서 백두산으로 이동하다.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와 교 류협력을 위해 북간도로 이동하였 으며 참모장 김동삼은 북로군정 서 본부를 방문하여 6일 동안 체 류하며 서일, 김좌진과 협력방안 을 협의하였다. 두 군정서는 대한 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두 기관 의 협력은 물론 군사상 모든 사항 을 서로 협조할 것이며, 사관의 양 성과 무기구입도 상호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1919년 8월, 장강호 마적떼는 신흥무관학교를 습격하여 교장 윤 기섭 등을 납치했던 일본 관동군 합동수색대의 앞잡이가 되어 한인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중일합동수사대는 삼원포 일대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한인사회를 붕 괴시키기 위해 연속적인 공격을 감행해 왔다. 무고한 양민들의 피해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서로군 정서 수뇌부는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교성대를 편성하여 지청천이 이끌고 백두산 기슭 안도현 내두산(奶 頭山)으로 이동하였다. 서로군정서 교성대의 주둔지 및 훈련지로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의 밀영지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조선족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 내두산촌) 한족회는 삼원포 일대 수전을 개발하여 벼농사를 시작하여 한인사회 안정과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군비에 충당하다. 서로군정서 교성대 주둔지(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 내두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