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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 • 문일민 · 안혜순 선생 65 일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1944년 10월 23 일에는 참모부 참모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에 충실히 앞장섰다. 1943년 10월 9일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의 회기 중인 11월 15일 회의 에서 “굶어 죽을 각오로” ‘한국광복군 활동 9개 준 승(準繩, 따라야 할 기준)’의 무효를 선언하자고 주 장했다. 이 준승은 중국국민정부가 광복군을 견제 할 목적으로 규정한 9개 조항의 규정이었다. 문일 민은 의정원 회의에서‘한국광복군 9개 준승’의 폐 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강경론은 결국 광복군 9개 준승이 폐지되어 광복군의 자주성을 관 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4월 11일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제3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패망 이 가시화된 시점인 1945년 8월 13일에는 박건웅·손 두환 · 유동열 · 김약산 등과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 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하기로 하고,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 각”한다는 내용의 의안 제안에 참여하였다. 일본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개회한 제39 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8월 23일 손두환 · 유 동열 · 김약산 등과 “국내 및 국제적 정세에 비추어 현 내각은 즉시 총사직하고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조직 하여 시의(時宜)에 필요한 일체 시급한 사무를 처리토 록” 하자는 의안을 제안하였다. 1947년 10월 정치지도자들 각성 촉구 할복 의거 광복 후인 1946년 5~6월 경 국내로 돌아와 1947 년 2월 국민의회의 노농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해 10월 25일 서울의 중앙청 입법의원 의사당 복도에서 자주독립을 방 해 하 는 사회정세를 통 렬 히 비 판 하 고 정 치지도자의 각 성 을 촉 구 하 는 유 서 를 남 기 고 할복(割 腹 ) 자 살 을 기 도 하 여 큰 반 향 을 불러일으키 기도 했다. 문일민은 비장한 각오로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다. 자주독립 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회정세를 지적하고 정치지도 자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장문의 유서와 김구·김규식· 유동열 등 민족지도자 3인에게 보내는 유서, 부인 안 혜순 앞으로 남긴 유서, 국민의회 앞으로 보내는 유서 할 복   후   쓰 러 진   문 일 민 의   사 진 을   게 재 한   『 동 아 일 보 』 (1947.10.26, 『오마이뉴스』 김경준 제공) 문일민의 할복 사실을 보도한 1947년 10 월 26일자 『조선일보』기사. “독립은 아직  멀고 민생은 날로 도탄에 빠지니 차라리 죽 음을 택한다”는 아래 부분 기사(3단) 내용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