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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 이재현 · 한형석 · 송면수 선생 65 1939년 10월에 결성된 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부터 한국국민당 을 지지하는 우익계 청년까지 아우르는 무장단체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항일전선에 본격 가담하던 한인 청년들은 전지공작대 등을 거쳐 결집되고, 다시 한 국광복군 5지대, 이어 제2지대의 중심 병 력이 되었다. 송면수, 한형석, 이재현은 독 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전지공작대에 참여 하고, 광복군에 합류한 청년들이었다. 최전선에서 싸우고, 군가를 작사한 이재현 이재현은 1917년 2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 다. 1919년 부친 이용환(李龍煥)과 함께 중국 상하 이(上海)로 건너갔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부친의 뜻 에 따라 형 이재천(李在天, 1913~미상, 애국장)은 동명학교(東明學校)을 다녔으며, 이재현은 인성학 교(仁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32년을 전후하여 형 이재천과 함께 상하이와 항저우, 난징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이 때 그는 이미 상하이 한인 소년들과 결성한 화랑 사(花郞社)에 가담하여 ‘상해소년동맹’ 등에서 활동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광복, 안공근 등을 알 게 되고, 이를 통해 소위 ‘김구 특무대’로도 불린 한 국특무대(韓國特務隊)독립군에 입단하게 되었다. 한국국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광둥성(廣東省) 일 대로 활동 반경을 넓히면서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서 한인 청년들과 교류하였다. 안우생(安禹生)에게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어를 사사받기도 했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단했다. 1939년 특무대 예비훈련소를 졸업한 후 김구의 아 들 김인(金仁)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창설 에 참여했다. 또 중국전시간부훈련 제4단 한인특별 반에 입교, 특별과정을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전지공작대 공작조장 등을 맡아 일본군 배후 공작과 한인 병사 모집을 담당하여 산시성(陝西省) 시안을 넘어 태항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리 고 1941년 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편 입되자, 제5지대 공작대 행동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2년 3월 지대장 나월환이 부하에게 살해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사실상 연좌 책임으로 1년 이상 고 초를 겪었다. 1944년 광복군에 복귀하여 제2지대에 배속되어 정훈을 담당하는 한편, ‘제2지대가’를 작사하기도 했 다(한국광복군 제2지대 전우장안회, 『불굴의 민족 혼』, 1994). 또한 임시정부와 미국간의 공조를 담당 하던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연 락을 맡기도 했으며, 국내 진공 작전인 ‘독수리작전 1947년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김구 주석과 함께한 안우생(우측 끝). 김구  옆의 여성은 안미생(김인 부인, 김구 며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