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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의병장 65 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나주지역에서는 전해 산, 오성술, 조경환 등이 ‘대동창의단’을 창설하여 1908년 8월부터 다시 의병전쟁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이후 나주 등지는 일본군의 탄압이 집중 되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권택, 박사화, 나 성화, 박민홍, 정도홍, 김도숙 의병부대 등이 지속 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09년 9월 1일부터 10 월 1일까지 30여 일간 전개된 남한대토벌작전으 로 의병활동이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오덕홍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30여 명 규모의 유격부대를 창설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소규 모 유격부대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남한 대토벌작전’을 위해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및 현지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했다. 그리하여 호 남 동북에서 서남으로 포위망을 압축했고, 해안선 에는 육지에서 밀려오는 의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뢰정대를 출동시켜 해안을 봉쇄하였다. 일 본군 은 1909년 여름에 들어서도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전쟁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대규모 군사작 전을 실시했던 것이다. 오덕홍은 일본군의 탄압작전에 대항하여 의병부 대를 이끌고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거나 배신자 등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 했다. 오덕홍 의병부대 등의 유격전은 성과를 보여 10월 1일로 끝내려고 했던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 전이 10월 25일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오덕홍 의 병장은 1909년 9월 23일 나주군 아계면(芽界面) 일 동(日洞)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피살 순국하고 말았 다. 오덕홍 의병장은 의병전쟁 마지막 시기 가장 치 열했던 의병전쟁 전장지에서 의병전술의 전형을 보여준 의병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북 지방 활동 산남의진 참모와 휘하 의병장으로 활약 김일언 의병장은 1907년 4월 정용기(鄭鏞基) 의 나주읍성 남고문(1993년 복원, 한국관광공사 제공) 1910년대 나주읍성 동점문(東漸門) 밖 석당간 (石幢竿,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