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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 송몽규 · 안창남 · 김필순 지사 65 급한 수준의 실업교육을 위주로 이 루어졌으며, 고등교육의 기회는 무 척 제한적이었다. 일제는 교육을 통 해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는 식민지 노예를 만들고자 했으며, 고등교육 을 받은 극히 일부의 조선인들은 체 제 내에 편입하여 식민 통치에 활용 했다. 그러나 송몽규, 안창남, 김필 순 지사는 일제 식민지의 앞잡이(走 狗)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민족의식 을 정립하였다. 이들은 모두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에 결코 좌절하 지 않고, 마땅히 이루어져 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송몽 규 지사는 28세, 안창남 지사는 29 세, 김필순 지사는 41세의 젊은 나 이에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 타깝게 순국했다. 송몽규 지사(宋夢奎, 1917~1945) 송몽규 지사는 1917년 9월 28일 중국 용정 명동 촌의 윤동주 집에서 태어났다. 고종사촌 형제인 윤 동주와는 삶과 죽음을 같이한 특별한 사이였다. 송 몽규는 기독교 민족학교로 널리 알려진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학창시 절은 혼란스러웠다. 1920년 경신참변을 계기로 사 회주의 세력이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널리 퍼졌으 며, 이들은 반기독교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송몽 규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1935년 3월 은진 중학교를 자퇴하고 중국 남경의 학생훈련소에 입 소 하였다. 학생훈련소는 김구 선생이 중국 중앙육군 군관학교에 입학시킬 청년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 립한 것이었다. 학생훈련소는 일제의 압력과 독립 운동 진영의 내부적인 혼란으로 학생들의 군관학 교 입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1935년 10월 해산되 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 제남(濟 南)의 이웅에게 갔다. 하지만 독립운동 계열의 내부 혼란으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36년 4 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1936년 9월 송몽규(가운데 안경)와 윤동주(뒷줄 오른쪽 끝) 송몽규(맨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