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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영월엄씨대종회보 43호 아 황해도 장연군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셨다. 공은 광무황제의 특사(特赦)로 유배에서 풀 려난 1908년 다시 이은찬(李殷贊)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재개하셨다. 이은찬은 1907년 1 3도 창 의대진소(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을 실질적으로 기획·추진했으나, 서울 진공전의 실패 이 후 독 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임진강 유역의 양주·포천·연천·연안 일대에서 인근의 의병진과 연 계하 며 일본군 파견대를 기습공격하는 등 유격전을 전개하셨다. 해윤공은 이와 같은 이은찬 의진에서 참모로 활동하셨으나, 그 뒤 이은찬 부대에서 이종협 (李鍾 協)의 1대가 분리 독립하자 이종협 의병진의 참모로 활동하셨다. 공은 그러나 1908년 12월 황 해도 금천·토산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히셨다. 공은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09년 4월 13일 탈출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교형(絞刑)을 받고 1909년 11월 30일로 추정되는 날 순국하 셨다. 정부에서는 해윤공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필공(柱弼)은 생년월일 미상인 함북 사람으로,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한자어로는 海蔘 威) 지역에서 구국운동을 벌인 항일운동가이다. 공은 구한말에 국운이 기울자 구국의 일념으 로 러 시아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상업에 종사하셨으며, 191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최재 형(崔 在亨)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셨고, 특히 일반청년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셨다. 공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1918년에는 민단장(民團長)에 선출되어 재러 동포사회를 위 하여 적극 노력하셨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1918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일본군대가 파 견되 어 러시아 백파를 지원하자, 한인 독립운동 세력들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 로 일 제에 대항하셨다. 이에 일제는 1920년 4월 5일 신한촌을 포위하고 한인들에게 일제히 사격 을 가 하였다. 이때 많은 한인들이 살해당하였으며, 300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당하였다. 일본군들 은 체 포된 사람들을 학교에 가두고 그 건물을 불태워 죽였다. 일본군의 이러한 만행은 니콜스크 우 수리 스크에서도 행해졌다. 당시 니콜스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 노인단,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지부, 독립단, 임시위생 회 등 이 활동하고 있었고, 특히 1920년 3월에는 대한국민의회가 본부를 이 지방으로 이전하였다 . 그리 고 이 지역에서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이었던 최재형이 김이직(金理直), 황경섭(黃景燮) 그 리고 역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