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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5년 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월의 독립운동 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관은 대한제국 정부와 한 국 토착 상인의 경제적 독립을 위협했다.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주도층 대구광문사 발의와 북후정 민중대회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즉 1907년 1월 29일(음력 1906년 12월 16일) 대구광문사의 서상돈·김광제 등이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열었고, 회의 를 마친 후 서상돈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 는 건의서를 낭독하면서 발의되었다. 곧이어 대동광 문회는 이 운동을 널리 확산시키고자 했다. 즉시 서 상돈의 건의서를 「국채보상취지서」로 변경하여 지 방의 각 지역과 서울의 주요 언론기관까지 전국적으 로 배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발의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이미 경남의 동래(현재 부산)에서 국채보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 다.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설립된 국채보상기 성회의 국채보상기성회취 지 서에 의하면 “영남의 동래와 대구 등지의 여러 군자들이 담배를 끊어 보상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동래와 대구 등의 여러분들이 한 몸 으로 뭉쳐 이 회를 만들어 국 채보상기성회라고 이름을 지 었다”고 하였다. 부산 동래에서 처음 제기되 어 대구에서 발의하면서 전국 적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개항 이후 일본의 경 제 침략에 위협을 느낀 대구와 동래 두 지역 상인들 의 대응책이었다. 또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응하여 일어난 국권회복운동과 그 목표가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가 국채보상을 발의 한 뒤, 곧이어 2월 초순에 「국채보상취지서」를 각지 에 배포하였다. 서상돈·김광제 등은 대구의 서문 밖 수창사 안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두는 한편, 1907년 2월 21일 북후정(北堠 亭)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북후정 민중대회에서 대구민의소는 「민의소 규 칙」을 제정하고, 「금연상채회 임원록기」를 작성하여 임원을 정했다. 이날 제정된 「민의소규칙」은 「금연 상채회규칙」이었다. 북후정 민중대회에서는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 회원을 비롯하여 부녀자들도 동참하여 기꺼이 패물 을 내어놓았다. 심지어 걸인·백정·마부·종업원 등까 지 돈을 냈다. 첫날에 모인 돈이 거의 500원이나 되 『대한매일신보』(1907.2.21)에 실린 잡보 「국채 일천삼백만원 보상취지 대구광문사장 김 광제 서상돈 씨등 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