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page

64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1월의 독립운동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896년 1월 그는 장상홍 (張相弘), 정래의(鄭來儀) 등과 함께 안동의진에 참여 해서 좌익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임금의 해 산 명령에 따라 의병에 나선지 반년이 못되어 고향 으로 돌아왔다. 최세윤은 학림강당(鶴林講堂)에서 향 리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선조인 최천 익(崔天翼)의 『농수선생속집(農叟先生 續集)』을 간행하며 때를 기다렸다. 한 편으로는 흥해를 비롯한 경주 영천 일 대 우국지사인 이후(李垕) 조성목(趙性 穆) 등과 교유하며 신망을 쌓았다.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에 반대하 는 여론이 크게 확산되던 1906년 봄에 그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던 정용기(鄭鏞基)의 요청을 받았다. 마침 병에 걸려 바깥 출입을 하기 어렵던 그 는 의병의 모집과 무기 조달 그리고 정 보 제공 등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용기가 체포됨으로써 산남의 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노력으로 석 방된 정용기는 1907년 봄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여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10월 이들은 포항 입암에서 격전을 벌 이다 정용기를 비롯한 40여 명이 전사 하였다. 산남의진의 의병장에 추대된 정환직은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다가 그해 11월 포항 각전(角田)에서 체포되 어 순국하였다. 1908년 3월 최세윤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산 남의진의 제3대 의병장을 맡았다. 이들은 흥해 · 청 송 · 영덕을 비롯한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최 세윤은 남동대산(南東大山)을 본진으로 삼아 각 부 2022년 8월 9일 경북 포항시 흥해읍 흥해향교에서 열린 ‘제3회 최세윤 의병 대장 추모식 및 전국한시 지상 백일장 시상식’(경북매일 제공) 최세윤의 공소기각을 판결한 조선총독부 당국의 판결문(1911.12.12, 국가기 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