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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4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9월의 독립운동가 협상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 校) 내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지청천(池靑天)·오광선(吳光鮮)·이범석(李範錫) 등 만 주에서 활동한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교관으로 활약 했다. 1934년 2월 안춘생은 16명의 동지와 한인특 별반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왕형(王衡)’이란 중국식 가명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6년 6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보병과를 졸업한 그는 중국 육군 제2사 보충여3단 8연대에 배속되었다. 당 시 그는 장쑤성(江蘇省) 타이현(泰縣)에서 모병한 신 병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한편, 안공근 · 안경근이 주 도하고 있던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한국국민당 당원 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후에는 중국군 장교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가 속한 육군 제2사는 장 쑤성 서쪽과 상하이 지역을 방어하며 일본군과 격전 을 벌였다. 상하이 북쪽 관문인 장완(江灣)지구 전투 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1938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후방 병원에서 치료를 마 친 그를 포상했다. 안춘생의 활약은 『신한민보』를 통 해 미주 동포들에게도 전해졌다. 중국군 장교 였던 그는 중국 측과 접촉하여 임시정부 가족들의 안전 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커우(漢口), 광저우(廣州), 창사(長沙) 등지로 임시정부 가족들이 이동할 때 이 를 엄호하기도 하였다. 1938년 창사에서 열린 3 · 1절 19주년 때는 기념대회에 참석하고, 기념공연에서 배 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본격적 독립 전쟁을 대비하며 군사조직 창설을 추진했다. 1937 년 7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며 독립전쟁 계획안을 수립한 임시정부는 1939년 군사특파단을 조직하여 시안(西安)에 파견하였다. 이때 안춘생은 노백린의 아들 노태준 등과 특파단에 합류하여 산시성(山西省) 일대에서 초모(병력 모집) 활동을 담당했다. 군사특 파단은 한국광복군의 토대가 되었다. 군사특파단이 확보한 거점을 중심으로 각 지대가 조직되고, 병력 이 확보되었다. 광복군 총사령 참모 이준식(李俊植) 과 함께 활동하던 안춘생은 광복군 제1지대에 배속 되었다. 제1지대는 징모(徵募) 제1분처로서 산시성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안춘생의 묘 대한민국 육군 소장 시절의 안춘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