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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3년 1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2월의 독립운동가 였다(239단우). 1933년 1월 15일 상하이에서 소집된 한국독립 당 제6차 대회에 제5구 대표로 참석하여 이동녕(李 東寧) 등과 함꼐 감사에 선임되었다. 1935년 2월 15일 개최된 제7차 대회에는 유진동과 함께 ‘제4구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4년 봄 박창세 · 차리석 등 과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한국독립당 사무소에서 김사집 · 이창기 · 이중환 · 이상일 부부 · 박경순 부부 와 함께 생활했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와 한국독 립당 사무소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 사실이 포착 되면서, 11월 초순 항저우시 서대가(西大街) 도항리 (濤桓里) 12호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전 직전인 10 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 최되었고, 조완구·신공제와 함께 임시의정원 상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광 동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김원봉 일파 의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싫증을 느끼고” 박창 세 · 조소앙 등과 탈당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 하였다. 그는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중국국민정부 를 따라 관내지역을 유랑할 때도 임시정부를 떠나 지 않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 행하였다. 즉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부 터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의 피난 과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 계속 참석했던 것이다. 그는 임 시정부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 안착한 뒤인 1941년 10월 15일 열린 제3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도 출석했다. 1942년 10월 25일 열린 제34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제3과(재무 · 예산 · 결 산)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 28일에는 최동오 · 조완 구·이복원 · 조성환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 기간 내에 중·미 · 영 · 소 등 연합국 정부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안에 참여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1943년 4월 2 1943년 2월 15~20일 사이 임시정부 소재지 충칭(重慶)에서 열 린 조선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표대회 당시 새로 조직된 중앙집 행위원회위원 및 집행부 임원들과 함께 한 문일민(빨간색 원 표기,  김영범 제공). 앞줄 가운데에 김규식과 김원봉도 보인다.  1942년 10~11월 충칭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제34회 회의 참석  후  요인들과 기념촬영한 문일민(빨간색 원 표기,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