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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3년 10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0월의 독립운동가 동원하여 근간의 ‘산해관 · 열하 사태’로 인한 중국정 부의 강경태세를 누그러뜨리고 중국군의 대일항전 을 중단시키며 한인들의 항일운동도 압박 · 저지토록 할 공작을 획책 중이라 하였다. 그 풍설을 곁들이면 서 원심창이 아리요시의 동정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 고 설명했다. 아리요시의 밀회일이 3월 17일로 결정되었다는 추가정보가 들어온 후, 당일 저녁에 세 사람이 공동 조계로 들어가 송강춘에 다다랐다. 먼저 들어간 원 심창을 따라 백정기와 이강훈이 2층으로 올라가는 데 일본영사관원 10여 명과 영국경찰 수 명이 나타 나 고함치며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미리 대기 중이 었고, 3인은 꼼짝없이 체포되는 수밖에 없었다.‘육삼 정 의거’로 불려왔지만 실은 그곳에 이르기도 전에 ‘암살 미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영사관 에서 오키를 밀정으로 이용해 상해의 한인 아나키스 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벌인 역공작의 결과였음이 근래의 한 연구에서 자세히 밝혀졌다.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끌려간 3인은 엄중취조를 받던 중에 다음과 같이 호언하였다. “한 인간으로서 생각할 때 아리요시 개인에게는 하등의 감정이 없 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악이며 참 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리요시 공사는 일본제국주의의 대표자이니, 그를 암살하는 것은 일 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행위이다. 우리 무정부주의 자의 당연한 길이고 의무이다.” 사법영사의 예심 종 결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된 3인은 7월 5일 일본 나 가사키의 우라카미 구치소로 이송되어갔다. 재판정 에서 백정기가 본인과 원심창이 주도한 것처럼 진술 하고 구치감에서는 그것을 우리말 노래인 양 불러대 며 원심창에게 일러주니 후자도 동조하여, 백정기와 원심창은 주범, 이강훈은 종범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비공개 재판에서 백정기 · 원심창은 무기징역, 이강 훈은 15년형을 언도 받았는데, 백정기는 지병이던 폐결핵 악화로 1934년 5월 22일 옥중 순국하였다. 수형 중에 이강훈은 일왕의 득남 자축‘은사’로 형기 의 1/4이 감형되었고, 1940년의 대사령(大赦令)으로 잔형의 1/2이 다시 감형되었다. 그래서 1942년 7월 25일로 형 만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일제 당국은 이 강훈의 열렬한 독립사상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음 을 알아채고, 석방 대신 예방구금에 처하였다. 그래 서 그는 곧장 규슈 남단의 구마모토 감옥에서 도쿄 의 도요다마 예방구금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고 10월에 출옥한 그는 12월에 귀국해 백정기 · 윤봉길 · 이봉창 3의사의 유해 발굴과 그 봉환 문제를 김구 등의 임시 정부 요인들과 상의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돌아가 3의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낸 후, 1946년 4월에 유 해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 결과, 7월 6일 합동장례를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다시 일본으 로 간 그는 1950년 8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을 결 성하고 활동하다 1960년 영주 귀국하였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다. 아나키스트 의열투쟁의 선봉장 엄순봉 엄순봉은 1906년 1월 26일 경상북도 영양군 대천 동 옥산마을에서 농민 엄덕진과 권인녀 부부의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호적명은 형순(亨淳)이고 별호는 추수(秋水)였다.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할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