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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63 대전자령 전투 시연 모형 전시 (독립기념관) 기관 파괴, 일제 관헌 응징 등 항일무장투쟁을 비롯하여 친일인사 숙청, 악덕 부호 응징 등 독립항쟁 에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처벌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중국 의용군과 연합 작 전을 통해 만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 해방 전쟁을 하기로 계획하고 여러 차례 공동 투쟁을 벌 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29년 유하현 조선혁명군, 1932년 양기하 부대의 혈투, 흥경현 영릉가 전투가 대표적이다. 특히 1932년 3~7월 벌어진 영릉가 전투는 조선 혁명군 1만여 명과 중국 의용군 2만여 명이 연합 전선을 통해 일본·만주 연합군 5만여 명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였다. 3월에는 일본군 사상자 30여 명을 냈 고 , 5월과 7월에는 100여 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냈다. 이후 양세봉이 암살되었으나 남만주 일대에서 의 무장 투쟁은 1938년까지 활발히 지속되었다. 그런가하면 북·동만주 일대에 서는 한국독립군(총사령 지청천) 이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중국군 과 연합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북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길림자위군과 합동하여 일 본군 및 만주국군과 전투를 벌였으 며 1933년에는 중국 호로군과 연 합하여 대전자령 전투에서 큰 승 리를 거두었다. 당시 일본군 130여 명을 살상하고 무기·탄약과 같은 상당한 군수물자를 탈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밖에도 중국 호 로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경박호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 항일 전투에서 연이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중국군과 갈등을 겪은 한국 독립군은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주요 인물들이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항일 유격대와 조국 광복회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 일대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반일 유격대, 항일구국유격군 등 여러 항일 유격대가 결성되어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한인 항 일 유격대는 중국 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에 소속되었다가 ‘민생단 사건’ 등을 겪으며 1935년 동북 항일연군이 되었다. 이들은 함경남도 갑산의 면소재지인 보천보를 공격하여 관공서 등을 파괴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