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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씨대종회보 43호 41 순봉공(舜奉)은 1906년 경북 영양(英陽)에서 출생하셨으며, 일찍이 만주에 망명하여 1929 년에 북만주(北滿洲) 석하(石河)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청년부장(靑年部長)에 임명 되어 활동하셨다. 또한 재만주 조선인(在滿洲朝鮮人) 아나키스트 연맹에 가입하여 이준근(李 俊根) 이붕해(李鵬海)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활동하시다가 상해(上海)로 가셔서 1933년 8월 그곳 에서 흑색공포단에 가입하고 옥관빈(玉觀彬)의 변절 행위를 묵과할 수 없어 그를 처치하셨다. 그리고 상해남화한인청년연맹(上海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당원이 된 후, 일본공사인 유길 명(有吉明)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셨다. 1935년 3월 25일에는 상해 조선인 거류민 회장인 이용 로(李容魯)의 악질적 밀정 행위를 참을 수 없어 그를 총살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셨다. 그리 하여 1936년 4월 24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38년 4월 9일에 사형 순국하셨 다. 공 께서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비굴함이 없이 의연한 태도로 입회 법관이 유언을 청하자 “인류의 정복 과 피정복의 비극을 없애고 민족의 압박과 착취없는 진정한 세계평화에 힘쓰라”고 꾸짖으셨 다 한 다. 그리고,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 만세와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형이 집행되었다 한 다. 그 리고 순봉공의 출생지인 경북 영양군민들은 1977년 10월 영양면 서부동중고등학교 교정에 ‘추수 엄순봉선생순국창렬비’(秋水 嚴舜奉先生殉國彰烈碑)를 건립하여 후세에 그 유지(遺志)를 영구 히 전 하게 되었다. 다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봉공의 남아 계신 유족을 전혀 찾을 길이 없 어 한 스럽다. 정부는 순봉공의 공을 기려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해윤공(海潤)은 1860년 강원도 영월 부내면에서 출생하신 구한말 의병이시다. 공은 1906 년 가 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노응규(盧應奎)가 충북 황간(黃澗:현 영동군(永同郡))에서 다시 의거 할 때 참여하셨다. 공은 선봉장(先鋒將)으로 무기를 수집 제조하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맹훈련을 실 시하 셨다. 이윽고 병력이 증강되자 군사를 파견하여 철도 등 적군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고 일본군 의 척 후병을 섬멸하여 각처의 의병진과도 연락하며 대진격을 준비하셨다. 그러나 1907년 1월 적 측의 간계에 속아 노응규를 비롯한 서은구(徐殷九)와 해윤공 등 의진의 핵심 인사들이 붙잡히는 불 운을 겪게 되셨다. 해윤공 등은 옥중에서나 검사의 심문에도 강경한 태도와 답변으로 항일 토적(討賊)의 대의 를 주 장하며 절개를 굽히지 않으셨다. 결국 노응규 의병장은 옥사하고 해윤공 등은 유형(流刑) 7년 을 받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독립 유공자 편 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