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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 • 근우회 창립 63 을 이뤘다. 3·1운동에서 여학생 을 비롯한 여성들이 보여준 활약 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 해 여권을 보장한다는 제도적 선 언이 이루어지면서 여성과 여성 운동을 바라보는 사회 인식 역시 달라졌다. 3·1운동 이후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이끄는 여성운동은 사회운동의 하나로 자 리를 잡았다. 1920년대 초에는 기독교계 여성운동 가와 여성 교육가가 주도하는 여성 계몽운동이 사회 적 주목을 받았다. 또한, 신여성의 등장이라는 문화 현상 속에 여성해방론이 등장했고, 1920년대 중반 에 이르러서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 성운동도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에 여성운동계 전반을 아우르는 전국적 여성운동 단체 인 근우회가 탄생했다. 근우회의 창립 배경과 과정 ① 근우회의 창립 배경 1920년대 여성운동이 제일 먼저 제기한 의제는 ‘여성 계몽’이었고 계몽의 수단은 교육이었다. 3·1운 동 직후 선도적으로 여성 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여성 운동단체는 조선여자교육회였다. 차미리사는 1919 년 경성(京城) 종교교회에 부인 야학강습소를 설립 하고 이듬해에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했다. 조선여 자교육회는 여러 유지의 도움으로 1921년 5월 경성 청진동에 회관을 마련했다. 하지만 운영비가 부족했 다. 차미리사는 순회강연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어 기금을 모았다. 순회강연단은 7월 9 일 경성을 떠나 9월 29일 남대문으로 돌아올 때까지 84일 동안 67개의 지역에서 강연했다. 이와 같은 여성 계몽운동의 주역은 ‘모던걸’이라 불린 신여성이었다. 1920년 3월 김일엽은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여권 신장을 주장하며 신가정 의 상을 제시했다. 1923년에 천도교에서 여성잡지 『신여성』을 창간하면서 이제 신여성은 중등학교 정 도를 졸업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들 신 여성은 직업과 가정을 양립하고 자유연애 결혼으로 부부 중심의 이상적 가정을 꾸리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여성운동 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이 주장되면서 이와 같은 신 여성상이 비판되었다.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신여성 이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 급의식을 가진 무산 여성으로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 하고자 하는 정열이 있는 새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여성운동은 기 독교를 배경으로 미국 혹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신여성과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신여성 이 이끌었다. 기독교계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 는 1923년에 8월 23일에 창립한 조선여자기독교청 년회연합회(이하, YWCA)였다. YWCA는 창립한 지 「여성동우회 발기회」 보도 기사 (『동아일보』 192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