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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도연 선생 63 내에서의 반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 다. 그리고 각급 학교와 공식 회합에서 조선 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1942년 ‘조선어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 를 해체시키려고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김도연도 1942년 12 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경찰에 피체되어 종로 경찰서에 구속되고 말았다. 그가 이 사건에 연루된 이유는 일찍이 조 선어학회의 인사들과 깊이 교류를 하고 있었 고, 또한 조선어학회에 음으로 양으로 자금 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종로경찰서에서 다시 홍원경찰서로 이송되어 일제 경찰로부터 심 문을 받았다. 이때 이른바 ‘비행기 고문’이라 는 악형을 받고 의식을 잃 기도 하는 등 매일같이 경 찰서에서 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조선어학회 사 건으로 검거된 인사들은 경찰의 취조와 검사의 조 사를 받기까지 근 1년이 란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 야만 했다. 이후에도 김도 연은 예심판사의 심문을 거쳐 무려 20개월 동안 미 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보냈다. 결국 1945 년 1월 16일 함흥지방재판소의 최종 판결, 즉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으로 판결 직후 병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감옥에서 출소한지 7개월 만에 8 · 15광복 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 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 다. 1946년 12월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 서 울에서 당선되었다. 또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한민 당원으로 출마, 당선되어 재경분과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8월 초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에도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 고, 1967년 7월 19일 아침 서울에서 7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 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2 · 8 공원에 있는 ‘상산 김도연 박사 동상’ (강서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