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page

1월의 독립운동 • 국채보상운동 63 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참여는 불길처럼 전국적 으로 확산되었다.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은 “한편으로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보조‧유지‧회복하 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보수 지배 세력의 횡포로 부터 민중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해 민중의 의식을 계발한 조직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 다. 한국 최초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는 1904년 6월 서울에서 설립된 국민교육회이다. 국민교육회는 교 육 진흥을 위해 학교의 설립,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의 편찬과 번역, 한국 역사책과 지리책 및 고금 명인 전적을 수집하여 널리 펴내는 등 교육과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기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 설 립된 우현서루(友弦書樓)와 1905년 2월 설립된 시무 학당이 그 시작이었다. 이와 더불어 1906년 1월 설 립된 대구광문사와 같은 해 8월 설립된 대구광학회 가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목표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대구광문사와 대구광학회가 애국계몽운동을 벌 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 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한국통감부 지배가 점차 노골화되면서 자산가인 지주 · 상인 계층은 직접 적인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 혁 과정에서 늘어난 국채 1,300만원과 그에 대해 난 무하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일본이 국채 1,300만 원의 담보로 대한제국 정부가 가진 전국의 수조권 (收租權)을 차지한다는 유언비어도 그중의 하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기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원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한다는 영남지방 상인들의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일제 침략세력 은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을 조선 정 부에 차관으로 제공하였다. 나아가 러일전쟁 이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1904년 9월 대한제국 정 부의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일제의 차관 공세 목적은 첫째,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 었고, 둘째,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토대를 만 대구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기념관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