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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 최세윤 · 정원집 · 김영백 의병장 63 지사들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악전고투하였다. 일제 군경의 잔혹한 진압 으로 인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전사하는 의병 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 는 과정에서 인권유린이나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하 였다. 그들은 의병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체포된 의병들을 도주를 빙자하여 일부러 학살하였으며, 부상당한 의병들을 공격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의병에 관한 정 보를 얻기 위해 의병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죽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말(대한제국기) 의병 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면서 일제 군경과 싸우다 가 이름 모를 산골짜기와 들녘에서 목숨을 바쳤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제3대 의병장 최세윤 최세윤(崔世允, 1867-1916)은 경북 흥해군 서면 곡성리 학림동 살았다. 그의 본관은 곡강(曲江), 이명 은 최세한(崔世翰), 호는 농고(農皐), 자가 성집(聖執/ 成執)이다. 일본측 자료에는 주로 최성집으로 기록되 어 있다. 1908년 3월 경주경찰분서에서 내부 경무국 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최세윤의 친족은 흥해군 의 소작농으로 대부분 가난하게 생활하였다. 최세윤 은 흥해군의 형리(刑吏)와 병방(兵房) 서기로 활동하 다가 1896년에 의병에 참여했다. 1894년 동학농민 혁명 당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했다고 하나, 의 병부대의 소모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일본 군경은, 그가 의병에 가담하기 전에 농사 를 지으며 학교 교사를 지낸 것으로 파악했다. 1895년 후반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기점 으로 복수토적(復讎 討賊)과 보발론(保髮論, 상투를 튼 머리카락을 보존하자는 주장)을 표방한 의병이 1985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세워진 ‘산 남의진발상기념비’의 앞부분 모습(경북신문 제공) 경북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의 고와실에 있는 '산남의진(山南義陣) 고와실  전투 기념비'. 최세윤 휘하의 서종락 의병장 등 의병 수십명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