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page
이달의 순국선열 • 최현배 선생 63 ‘국어’의 지위를 잃고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 으며, 우리말은 ‘조선어’가 되었다. 이후 국권상실로 관립한성고등학교에서 이름이 바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1915년에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0년에 사 립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여 우 리말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페, 해방될 때까지 옥중 생활 1926년에 「조선민족 갱생의 도(道)」라는 글을 발표하여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실 천적 이상주의를 고취하고, 도덕 경장, 경제 진흥, 고유문화 진흥 등의 방법을 제시함으 로써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리 고 이 해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 교 교수로 취임하여 『우리말본』의 저술을 계 속하는 한편, 같은 해에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어 『한글』지 창간, ‘한글날’ 제정에 참여하였다. 1929년에는 우리 사회 각계의 유지 108인 의 발기로 조직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 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 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 력하였는데,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 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8 년 이른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에 검 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 에서 강제 퇴직되었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일제가 중국 침략을 앞 에 두고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을 단속하기 위 해 조작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처럼 실직 해 있는 가운데서도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 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짓기 시작하여 1942년에 출판하였다. 이 해 10월에 그는 다 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8 · 15 해 방이 될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다. 조선어 연희전문학교 교수 시절의 최현배(앞줄 가운데, 국가보훈부 제공) 1937년 간행한 『우리말본』(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 책 은 주시경 이래의 문법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 연구를 집대성한 저술이란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