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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마리아 선생 63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에 동참 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 2월 21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애덕 을 다시 만나 함께 이화학당 교사인 박인덕 (朴仁德)·신준려(申俊勵) 등을 만나 동경 2·8 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독립운동 의 전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어 교육계·기 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 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 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 하였다. 그는 2·8독립선언 직후 그 같은 민족 독립 운동의 열기를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촉발케 함으로써 조국 광복을 성취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그는 황해 도 봉산과 신천 등지를 돌며 지방 여성들에 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계속해서 3·1 운동의 소식을 전해듣고 지속적 독립운동 방 략을 모색하고자 서둘러 상경하여 모교인 정 신여학교로 달려갔다. 이 날이 서울 학생들이 남대문역(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3월 5일이었다. 물론 이 날 만세시위 에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대다수 참여하였 기 때문에 경찰의 방문조사가 이루어지게 되 었는데, 이 때 그는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경무총감부 에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뒤, 3월 27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 어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여기에서도 약 6개월간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았지만 불 굴의 독립정신으로 이겨내고, 결국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예심 면소(免訴) 결정이 되 어 석방될 수 있었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런 가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들(윗줄 가운데가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 회장 김마리아, 정신학 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