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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원국 · 김원범 의병장 63 형인 김원국(金元國)의 본명은 김창섭(金 昌燮)이며 1870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였 다. 동생 김원범(金元範)도 1886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차이가 16세나 되었으나, 1906년에 광주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함께 의병장이 되어 참전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09년 호남의병이 전국에서 60%에 달하는 전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전남 광주는 기우만의 봉기 와 김원국 형제의 무등산 봉기로 후기 전남 의병의 발상지이자 동시에 최후의 전쟁터로 기록되었다. 형 김원국은 1905년 광산군 송정리에서 일본군을 타살한 후 이듬해 3월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 대되었고, 동생 김원범은 그 선봉장이 되었 다.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 삼연(奇參衍)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이어 12월 김준(金準, 일명 김태원)과 합진하여 일 본군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아우 김원범은 1908년 7월 전해산 의병장 과 함께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 서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원야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했다. 1908년 9 월 김원국은 의병장 조경환(曺京煥) 의진에서 도포장으로 활동하던 동생 김원범을 따라 선 봉장이 되어 부하 100여명을 거느리고 전남 나주, 함평, 광주 어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호남의병을 초토화시키려는 일본 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은 의병부대를 사방 에서 압박해 들어와 1909년 1월 일본군의 기 습으로 광주 어등산전투에서 조경환 의병장 이 전사하고, 아우 김원범은 체포된 후 자결 김원국이 광주 출신으로 7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는 사실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아래칸 가운데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