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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류인식 선생 63 계획은 그 자신의 독자적 판단이 아니라 신 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과 관련된 것이 다. 그리고 이상룡 · 김대락 · 김동삼 등 안동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진행한 것이었다. 1910 년 말, 이상룡이 문중을 인솔하여 먼저 출발 하고, 이어 이듬해 1월 김동삼을 비롯한 내앞 문중들도 떠났다. 류인식은 그 다음 순서로 협동학교를 류동 태에게 맡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안동 유림 중 가장 늦게 망명길에 나섰던 것은 협 동학교를 맡아 운영할 적임자를 선발하여 인 수인계를 하는 등 잔무처리 때문으로 보인다. 안동 유림들이 정착한 곳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대고산(大孤山) 자락이 흘러내린 추 가가(鄒家街) 일대였다. 서간도 이주 한인들 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첫 삽을 뜬 것은 경 학사와 신흥강습소의 설치였다. 1911년 음 력 4월 경에 이회영 · 이동녕 · 이상룡 등 300 여명의 한인들이 대고산 아래에 모여 군중대 회를 열었다.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추대한 이 대회에서 한인들은 민단과 자치기관의 성 격을 지닌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할 것 등 5 개 항을 의결하였다. 경학사의 설립 목적은 이상룡이 기초한 「경학사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유구한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을 표방하고, 망국의 책임이 민족 전체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리고 모두 힘을 길러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역설하고, 경학사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경학사는 다음과 같은 조직을 갖추었다. 사장 이상룡,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류인식. 이를 보면 경학사는 안동 유림들이 중심이 되었고, 특히 류인식은 협동학교의 경험을 인정받아 교무부장에 선임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경학사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 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류인식은 1912년 말 일시 귀국했다가 경 찰에 잡히고 말았다. 귀국 이유는 가족을 데 리고 망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 나, 당시 경학사가 농업의 실패 등으로 재정 협동학교 졸업기념(1907년) 협동학교 졸업증서(1911.3.30, 이상 국가보훈부 제공) 류인식(두번째줄 가운데) 과 김동삼(뒷줄 왼쪽) 등 협동학교 교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