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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 이종암 · 엄순봉 · 이강훈 지사 63 경찰에 붙잡혀갔고, 철원지청 검사국의 엄한 취조를 받은 후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후 섣달 그믐날에 원 산행 기차를 타고 탈출해 북간도로 돌아갔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에 감명받고 이 해 7 월에 구강포를 떠나 1933년 2월초에 상해에 도착했 다. 김구(金九)를 찾아가 만나보고 지도받음을 기대 했는데, 가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시 절의 인연을 따라 프랑스조계 복이리로 정원방(亭元 坊)의 아나키스트 집거지로 가서 이달 · 백정기(白貞 基) · 엄순봉 등 8인의 동지와 합숙하며 지냈다. 앞서 1930년 4월 상해에서 류기석(柳基錫) · 류자명(柳子 明) 등의 주도로 아나키스트 비밀결사 남화한인청년 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 결성된 바 있다. 1931년 12월 초에는 자금 또는 정보를 제공해줄 만한 4~5명의 중국인 · 일본인 아나키스트와 청년연 맹과의 합작 제휴로‘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되었는데, ‘파괴와 숙청의 행동조직’을 강조하여‘흑색공포단(黑 色恐怖團)’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원방의 동지 전원이 두 조직에 가입해 있었고, 이강훈도 가 입하여 맹원이 되었다. 그가 보건대 흑색공포 단은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이 수행했던 임무를 이어받고 있었으며, 일제 타격의 방법론에서도 다른 점이 없 었다. 다만 김구의 민족노선과 달리 국제노선을 중 시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강훈의 정원방 합숙생활이 채 한 달도 안 된 때 인 3월 5일, 인근에 거주하면서 연맹의 사무를 전담 하고 있던 원심창(元心昌)이 맹원들을 찾아와, ‘오키 (沖)’로 불리는 일본인 아나키스트에게서 들었다는 ‘중요정보’를 전해주었다. 주중(駐中) 일본공사 아리 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조만간 정무협의차 일시 귀국 하는데, 그 전에 공동조계 홍구(虹口)의 문남사로에 위치한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중국정부 요인 과 은밀히 접선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요시는 1932 년의 5.15사건으로 수상 이누카이(犬養)가 피살된 뒤 실권을 잡은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의 충 복인데, 거금 4천만 엔(2천만 달러 상당)의 기밀비를 1933년 ‘육삼정 의거’에 가담한 이강훈(1번)과 백정기 의사의 모습(2번,  김광만PD 제공) 1946년 출옥 직후의 이강훈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