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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가 • 윤준희 · 임국정 · 한상호 · 김강 지사 63 호송대는 이날 오후 5시경 간도 용정촌 남방 2리 부근에 위치한 동량어구(東梁於口)에 도착했다. 이때 “사격”이란 소리와 함께 중국인 마적처럼 의복을 갖 춰 입은 이들이 총을 쏘며 호송대를 습격했다. 선두 에서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 나가토모(長友嘉相次)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날 습격으로 호송대는 조선은 행 용정지점으로 운반하고 있던 철제 궤짝과 우편물 행낭을 실은 두 마리 말을 모두 탈취당했다. 일제 당국은 사건 직후 주동자들을 찾아내기 위 해 집중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습격자들 을 ‘총기를 휴대한 조선인 마적 십수 명’으로 파악하 며, 정확한 숫자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서기 전홍섭(全洪燮)이 체포되면서 사건 주동자들의 대략적인 신상이 드러났다. 사건의 주역 은 바로 청년 윤준희와 임국정, 한상호, 최이붕(崔以 鵬, 이명 최계립 · 최봉설), 박웅세(朴雄世), 김준(金俊) 이었다. 청년들은 호송대 습격 후 사전에 약속한 대로 움 직였다. 박웅세와 김준은 집으로 귀환했고, 윤준희와 최이붕, 한상호는 국자가(局子街, 오늘날 연길) 교외 에 위치한 와룡동(臥龍洞)을 거쳐, 1월 5일 약속한 장 소인 왕청현(汪淸縣) 의란구(依蘭溝) 유채구(有菜溝) 로 탈취한 현금을 무사히 옮겼다. 이때 청년들은 최 이붕의 동생인 최봉준의 도움을 받아 현금을 무사히 운반했다. 청년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의 ‘독립전쟁’ 준비 1895년 12월 26일 함경북도 회령군 봉의면에서 태어난 윤준희는 유년시절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이후 중국 용정촌으로 이주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 에서 신학문을 수학했고, 1907년 서전서숙이 폐 교 된 후 영신학교(永新學校) 교원으로 민족교육활동을 이어나갔다. 한상호는 1900년 2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 온면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 연길현 길인향 와룡 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와룡동에 위치한 창동학교(昌東學校)에서 수학했다는 의견도 있다. 졸 업 후 와룡동소학(臥龍洞小學)에 재직하며, 한인 청 년의 민족정신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임국정과 최이붕도 창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 은 청년들이었다. 임국정은 1896년 9월 21일 함경 당시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와 앞거리 1920~30년대 함경북도 회령의 중심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