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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의병장 63 일본의 군대해산과 의병전쟁의 발발 대한제국은 1907년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불법 침략을 알 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특사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전권을 장악하여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 해에 정 미7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그 부속 각서로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 하였다. 군대해산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대한제국군의 반발에 대 비해 일본군을 재배치하였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1907년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 6월의 독립운동가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의병장 나주 일대서 최후유격전 벌이고 경북 동남부 산남 의진에서 맹활약 국권회복과 구국을 위한 후기 의병전쟁 글 국가보훈처 제공 오덕홍 의병장은 1909년 9월 23일 나주군 아계면 일동(日洞)에서 일본 군에 붙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그는 의병전쟁 마지막 시기 가장 치열했 던 의병전쟁 전장지에서 의병전술의 전형을 보여준 의병장이었다. 정래의 · 김일언 의병장은 1907년 4 월 재기한 정용기의 산남의진(山南 義陣)을 계승한 최세윤 의병장을 보 필하면서 경상도 일대에서 장기전 을 펼쳤다. 특히 남동대산을 근거지 로 하고 부대를 소규모 유격대로 나 눠 경북 보현산, 팔공산, 주왕산, 철 령, 주사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 했다. 그러나 최세윤 또한 1908년 8 월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이세기와 서종락 · 김사곡 등이 전사, 체포되면서 산남의진은 와해 되고 말았다. 6월의 독립운동가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의병장 나주 일대서 최후유격전 벌이고 경북 동남부 산남의진에서 맹활약 국권회복과 구국을 위한 후기 의병전쟁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吳德弘, 1885∼1909) (金日彦, 1859∼미상) (鄭來儀, 1872∼미상) 글 국가보훈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