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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영월엄씨대종회보 40호 源)공, 주복(柱福)공이 찬무(贊務)로 직접 참여 했다. 무자보(戊子譜) 참여 과정에서 삼성당공(三 겛堂公)계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대동보 성격 의 을해보(乙亥譜)와 계유보(癸酉譜)에 누보 (걼譜) 되면서 야기된 종지(宗支) 혼란사태 [정사보(丁巳譜) 삼성당공(三겛堂公) 현( ) 공의 선대(先代) 용공(用恭)공의 기사내용「庚 戌派譜公下只有一子 無 甲戌大譜(乙亥譜의 착오로 판단됨) 有一子 無 康津族以 手單 入걐故只載 以後大譜時考正」]의 진상을 파악 하게 된 점이다. 이에 후일 대동보(大同譜) 발간 에 대비한 각종 자료 수집과 분석에 들어갔다. [삼성당공(三겛堂公)계 참가 호수 31호, 관 (冠) 39, 동(童) 39, 보첩(譜諜) 10질(秩) 보 유] 8. 임인보(壬寅譜) 임인보(壬寅譜)는 1962년 서울 신당동에서 대동보(大同譜)의 성격을 띠고 24책(冊)로 간 행되었다. 규모도 방대해졌고 그동안 누보(派 譜) 되었던 많은 후손들이 입보(入譜)됐다. 삼성당공(三겛堂公)계는 경술보(庚戌譜)와 을해보(乙亥譜)에 누보(걼譜) 되면서 야기된 종지(宗支) 혼란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무자보 (戊子譜) 이후 찬영(贊永)공이 앞장서서 여러 종친들과 함께 각종 관계 사료를 수집·분석·고 증하여 종지(宗支)를 확연하게 정리한 자료를 보소(譜所)에 제시함으로써 임인보(壬寅譜)에 는 삼성당공(三겛堂公) 공이 용공(用恭)공 의 장자(長子)로 바르게 등재되었다. 이는 사필 귀정의 결과로서 종지(宗支)를 바로 찾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에 대한 합당한 판정이었다. 임인 보(壬寅譜) 간행에 삼성당공(三겛堂公)계에서 는 찬영(贊永)공이 찬무(贊務)로 참여했다. [삼성당공(三겛堂公)계 참가호수 104호, 관 (冠)동(童) 256, 보첩(譜諜) 14질(秩) 보유] 9.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는 1979년 서울 반 포동에서 병길(秉吉) 회장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양장본(洋裝本) 7책(冊)으로 간행된 명실 상부(名實相符)한 대동보(大同譜)다.[인쇄소 : 대전 회상사(回想社)] 대동보(大同譜)로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하 다 함은 엄문(嚴門)이 단일본(單一本)이면서도 충의공(忠毅公)계의 내부문제에 따라 그동안 대동보(大同譜) 성격으로 발행되었다고 보아온 무진보(戊굪譜) 초간본(初刊本)부터 별편(別 篇)으로 편집해오던 구습의 관행이 임인보(壬 寅譜)까지도 충의공(忠毅公)계 별도의 세보(世 譜)를 대동보 속에 편집해 왔으니, 엄문(嚴門) 대동보(大同譜)가 대동보(大同譜)라고 볼 수 없는 계보(系譜)나 파보(派譜)를 단지 한 질 (秩)의 보첩(譜諜)에 엮어 놓은 종합 편집본에 불과했다고 혹평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는 대동보소 (大同譜所)의 조정에 따라 충의공(忠毅公)계가 흔쾌히 합의하여 종지(宗支)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편집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그렇지 만 실제 내면적으로 볼 때는 불완전한 요소들이 상존하여 불씨가 재연될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