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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5년 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과 안창호의 대한인국민 회 간의 알력이 심하여 독 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많 은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대립을 해소해 보고자 유 학생들을 중심으로 파벌 타파에 나서게 되었다. 우 선 그는 뉴욕에 있던 유학 생들을 모아 상하이 대한 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첫 과업으로 『삼일신 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 신문 을 발행한 취지는 미주 동포들의 친목을 도 모하고 나아가 동포들이 합력하여 독립운동 에 온 힘을 다하도록 만드는데 있었다. 그 후 면학에 힘쓰기 위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 기게 되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가, 1932 년 7월 3년간의 연구 결과 ‘한국의 농촌경제’ 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한 창 박사학위 논문에 몰두하고 있을 즈음인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그 열기가 미국의 신문에도 보도되고 있었 다.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안승화 등 유학생들과 미국 국무성에 찾아가 광주학생운동의 전말을 설명하고 한국의 독 립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귀국 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다 1932년 7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 국한 뒤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 제학사를 맡아 강단에 서게 되었다. 2년간 강 단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중 교육계에도 일제 의 강압적 식민정책이 가중되는 것을 보고 실업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지인들과 협의하여 자본금 30만원의 조선흥업주식회 사를 창립하였다. 사장에 취임한 뒤 토지개 간, 임야벌채(伐採), 광산업 등 광범위한 분야 의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경영하던 회 사는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니 었다. 직원들의 화목과 상호부조를 도모하였 으며, 우국인사들의 울적한 마음을 풀어주는 휴식처로서의 구실도 하였다. 이처럼 사업에 열중하고 있던 1937년 일 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대륙에 대한 침 략을 노골화하였으며 국내에도 이른바 ‘황 민화정책’을 시행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 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일제 당국 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국 조선학회 기념촬영(1920년 4월 도쿄,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