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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4년 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조국의 운명을 붙잡을 수 없었고, 결국 1910 년 8월 나라가 망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를 당하고 말았다. 경술국치는 큰 충격이었 다. 이에 두문불출하고 국권회복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나철(羅喆)이 단군을 숭상하는 민족종교로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조국 독립에 노력하고 있다 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1910년 12월 25일 서울 간동에 있던 나철을 방문하여 대종교의 취지와 목적 등에 대해 듣고, 또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결국 12월 29일 대종 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했다. 일제 강점의 상 황에서 대종교를 통해 대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 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날 저녁 본 명인 ‘세린’을 국권회복의 의미를 지닌 ‘세복 (世復)’으로 바꾸고, ‘단애(檀崖)’라는 도호를 받은 뒤 대종교를 신앙할 것을 서약하였다. 대종교 포교 위해 만주 망명, 동창학교도 설립 · 운영 1911년 1월 29일 나철은 윤세복을 참교 (參敎)와 시교사(施敎師)로 임명하여 대종교 포교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즈음 나철은 일 제의 감시와 통제 때문에 국내에서 더 이상 포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 철로부터 서간도 지역의 포교활동을 의뢰 받 고 형 윤세용과 이 문제를 논의한 뒤, 형제가 같이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滿洲, 중국 동북 지방)로 향했다. 1911년 2월 추운 겨울 날, 윤세복 일가는 서간도로 향해 고난의 망명의 동창학원 제1회 졸업생 기념사진(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