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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3년 10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0월의 독립운동가 켰다. 그런 후 이종암은 서울로 가서 김한(金翰)의 도 움으로 은신해 지내다 1921년 12월 중국으로 탈출 하여 북경(北京)의 의열단 본부로 합류했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상해를 방문하던 날인 1922년 3월 28일,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의 암살거사가 감행되었다. 다나카는 1920 년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일본군이 북간도에서 벌인 ‘경신참변’때의 육군대신이었다. 이 거사에 이종암이 자원하여 제3선의 투탄저격수로 나섰다. 간도 출신 의 명사수 오성륜(吳成崙)이 제1선을 맡고, 전년도 9 월의 조선총독부 청사 진입 투탄거사를 멋지게 수행 해낸 김익상(金益相)이 제2선을 맡았는데, 두 단원의 연발사격 총탄이 불행히도 빗맞고 투척된 폭탄은 불 발하고 말았다. 이종암이 던진 폭탄은 다나카의 승 용차 앞바퀴를 맞췄으나 역시 불발하여, 다나카 암 살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현 장에서 붙잡히고 말았고, 이종암만 군중 사이로 숨 어들어 체포를 면하였다. 이종암은 1925년 7월에 밀입국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 폭탄거사를 결행키로 마음먹고, 폭탄 2개, 권 총 1정, 탄환 50발, 「조선혁명선언」 등사본 100매를 휴대하였다. 입국 후 그는 몇몇 동지들의 협조에 힘 입어 사업권 제공을 반대급부로 하는 5천 원씩의 제 공을 두 명의 지인에게서 약속받았다. 하지만 현금 이 마련되면 받기로 하고 달성군 노곡동의 한 산장 에 은신하여 기다리다가 1925년 11월 5일, 경북경 찰부 고등경찰과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만났거나 연락 중이던 동지 11명도 줄줄이 붙 잡혀가면서, 이른바 ‘경북 의열단사건’이 되었다. 경 북경찰부의 정보 · 수사 보고서에 이종암의 밀입국 정 보가 10월 20일경에 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 다. 결국 1926년 11월 예심이 종결되고 경찰이 사건 전모를 공개하니, 잇따라 신문보도가 나오는 중에 놀라운 내용들이 지면을 채웠다. 검사는 이종암을 의열단의 ‘부장(副將)’ 즉 부단장으로 지칭하면서 (다 나카)살인미수,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정치범 처벌에 관한 규칙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3년형을 언도하였다. 대전형무소에 갇힌 이종암은 감옥 환경이 극악한 데다 고문후유증까지 더해지면서 지병이던 각기병 에 위장병 · 폐병 · 인후병까지 더해져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니 1930년 5월 19일에 가출옥 되었으나, 열흘 만인 5월 29일 대구의 친형 집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값진 희생과 빛 나는 공훈이 오래도록 기려지게 하였다. 백절불굴의 의열지사 이강훈 이강훈은 1903년 6월 13일, 강원도 김화군 김화 읍 샘골[泉洞]의 유지 이기원(李起源)과 재령 강(康)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1918년에 결혼했다. ‘청구반도의(또는 청천백일 하 의) 우레’라는 뜻의 ‘청뢰(靑雷)’라는 호를 지어 썼다. 1919년 3월 12일, 거주지이던 김화군 서면의 독 립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고 주재소 헌병들에게 붙잡 혀갔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상해의 임시정부 소식을 듣고 동경하던 끝에 1920년 2월 집을 떠났다. 만주 와 상해를 전전하다가 북간도 용정(龍井)의 사범학교 를 다녔다. 1924년 모친상을 당해 일시 귀향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