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이달의 순국선열 • 조명하 선생 61 19일 상태가 호전되어 타이중형무소 독방에 수감되었다. 타이완총독부에서는 공모자 찾기에 혈안 이 되었다. 5월 15일 모르핀을 삼켜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진행된 취조 과정에서 고향 친구들인 오두식(吳斗植)과 김병렬(金炳烈)의 이름을 말했다. 타이완총독부에서는 조선총 독부에 협조를 요청하여 황해도 송화군과 신 천군에 연루자를 찾기 위해 일제 경찰을 파 견하였다. 또한 타이중시 초음정(初音町)·오 정목(吳町目)·최승한(崔承翰)의 집을 수색하 여 연루자의 흔적을 찾고자 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총독부에서는 5 월 8일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지룽항에 도착 한 후 지룽우체국에서 위폐(僞幣)를 교체하다 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니노미 야 척살 의거를 연계시키려 하였다. 사형 앞두고 장렬한 유언 남겨 타이완총독부는 조명하 의사의 의거 사건, 일명 ‘타이중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 해 재판 과정을 최소화하였다. 6월 13일 타 이완 법정에서 5명의 법관이 사건 심리를 끝 내고 다음날 사건 실상이 발표되었다. 6월 14일에는 가미야마 타이완총독을 비롯하여 고토 후미오[後藤文夫] 총무장관, 다나카[田 中] 군사령관의 담화가 잇따라 발표되었다. 7 월 18일 타이베이고등법원에서 이른바 형법 제75조의 ‘황족에 대하여 위해(危害)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위해를 가하려고 한 자 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라는 조항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형 무소에서 총살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조의사는 순국 직전 형리가 “할 말이 없는 가”라고 묻자 의연하게 다음처럼 말했다. “나 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 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 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타이완총독이었 던 가미야마 만노신이 사임했으며, 조선 총 독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가 사임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거사를 안내하는 표지 판이 타이중시청 앞 사거리에 설치되었으며, 그의 동상도 타이베이시 한국학교에 설치되 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 서하였다. 경기도 과천에 세워진 조명하 의사 동상(국가 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