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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도연 선생 61 간 전에 이미 초만원을 이루었다. 마침내 최 팔용과 윤창석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거행 되었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백관수가 독립선 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등단하여 결의문 을 낭독하였다. 그가 결의문을 낭독할 때 구 절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학생들은 비분이 충만하여 눈물을 흘렸다. 낭독이 끝나자 만장일치로 결의문이 채택되 었다. 이어서 비분강개한 유학생들의 독립을 향한 열변과 끝까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해야 만 한다는 학생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준비 된 계획대로 태극기를 흔들며 도쿄 시내를 행진하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들이 회관을 완전 포위하고 말았다. 독립선언을 한 학생 들은 무장한 일경들에 맨손으로 대항했지만, 회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면서 경찰에 의해 30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당국은 국제적 여론을 의식하여 김도 연 등 주모자들을 미결수로 약 반년 가까이 구금하였다. 얼마 후 도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하나이[花井卓藏], 우사와[鵜 澤廳明], 후세[布施辰治], 카나이[金井佳行] 등 양심적인 일본인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해 주었다. 재판 결과 김도연과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에게는 ‘출판법위반’으로 9개월의 금 고형이 언도되었고, 나머지 학생들도 7개월 의 실형을 받았다. 그는 1920년 4월에 출옥 했다. 미국 유학 중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삼일신보』 발간 2 · 8독립선언 이후 일본 유학생활에 회의 를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가 더 깊은 공부를 하려고 결심하였다. 이에 1922년 6월 두 번 째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뒤 오하 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경제학을 전공으로 2년 동안 공부 하다가 뉴욕에 있는 명문 콜롬비아대학으로 옮겼다. 콜롬비아대학에서도 경제학을 택해 2년 만에 ‘균형가격론을 분석함’이라는 주제 의 논문을 제출하여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 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이후 미국에서는 유학생 들의 친목과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학생 단체가 조직되었다. 1921년 4월 출범한 ‘북 미대한인유학생회’는 1923년 6월 시카고에 서 제1회 ‘북미대한인유학생대회’를 개최하 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학 생회는 학우들간 친목과 단합뿐만 아니라, 미국정부와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 리는 등 외교활동과 선전사업을 통해 독립운 동을 후원하였다. 그는 학문을 닦는데도 열 성적이었지만, 유학생회에 가입하여 미국에 사는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학생회의 사 교부장으로서 유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사업을 적극적 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주지역은 이승만의 동지회 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