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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오의선 선생 61 국내에서의 활동과 순국 그가 어느 시기에 국내로 들어왔는지는 확 실치 않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남선과 진 학문(秦學文)은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 를 창간하였다.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 서 오의선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여기저 기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 기도 하고, 또 독립을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조국 독립의 방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 던 중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과도 교류를 갖 게 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 曜會)에 가입하였다. 1925년 4월 17일 화요 회가 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 등 사회주의 단체들과 통합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면서, 경성부 간부, 중앙집행위원회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중 국 동북의 길림성(吉林省) 주하현(珠河縣)에 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자,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다 그 해 가을 제2대 책임비서 로 선임되었다. 또 체포된 공산당 당원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 모플(MOPR, 국제혁명자 후원회)이 설치되자, 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3월 고향인 용인에 들렀다가 같은 달 14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어 그 해 4 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 깝게도 옥중에서 심한 고문으로 폐결핵과 복 막염에 걸려 같은 해 5월 6일, 42살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오의선 판결 삼년에 언도」보도 기사 「일,이차 공산당관계자 오의선 작일 옥사, 병명은 폐결핵과 복막염, 사십삼세를 일기로」보도 기사(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