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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약연 선생 61 개칭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또 같 은 해 2월 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 회가 성립하자, 5월부터 대한국민의회 간도 지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당국으로부터 ‘독 립운동의 수령(首領)’으로 지목되었고, 중국 연길현장(延吉縣長)에 의해서 1920년 연길 (옌지)감옥에 투옥되었다. 1922년 출옥하여 1923년 봄 명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간도 자치권 획득에 노력, 1930년 명동교회 목사 부임 1923년 2월 26·27일 양일간 용정에서 ‘30 만 간도 한인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 보장’을 주장하는 전간도주민대회가 열렸다. 이 때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이후 간도의 자치권 획득을 위해 중국 당국과 교섭하며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면 모를 지켜본 중국인들과 중국 지방행정 당 국자들은 그를 간도의 ‘한국대통령(韓國大統 領)’으로 부르기도 했다. 1924년 흉년에 재정난이 겹쳐 명동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면서 명동촌을 떠나 용정 으로 이주했다. 명동학교는 소학교만 남기 고 중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일부 중학생들은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로 전학하여 학업 을 계속하였다. 이후 북간도지역 공산주의운 동의 영향으로 반종교 투쟁이 번지자 명동학 교 운영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은진중학교 와 명신여학교 이사장으로 교육계몽운동 및 기독교신앙 선교, 공동체운동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28년 기독교 신앙을 위해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년간의 연구과정을 이수 하고 1929년 2월에 졸업하는 특전을 받았 다. 졸업 후 캐나다 장로회의 동만노회(간도 노회)에서 목사로 일했고, 1930년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37년까지 명동교회에 서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을 전파하였다. 말년에는 캐나다 선교회가 운영 한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이사 장으로 재직하며 기독교 전교와 교육에 전념 하였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촌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 기고 사망하여, 명동촌의 장재촌 산기슭에 묻혔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은진중학교 졸업생·교사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김약연과  몽양 여운형(앞줄 가운데, 1936.6.13, 규암독립사상연구 소 제공).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전용 비행기로 용정에 와 서 동흥중학교의 축구대회 우승 시상식을 거행한 후, 이튿 날에 은진중학을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