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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류인식 선생 61 관계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 다. 류필영은 정재학파의 학통을 이어 훗날 영남 유림들로부터 ‘남곽북류(南郭北柳, 남쪽 에는 곽종석 북쪽에는 류필영)’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류인식의 스승은 척암 김도화(1825 ~ 1912)이다. 그는 김흥락과 함께 류치명의 제 자로서 학파를 형성했는데, 휘하에 문인이 322명에 이를 정도였다. 따라서 그의 학통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상정–남한 조-류치명의 적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도화는 1895년 안동의진의 대장으로 추대 되어 민족운동에 나섰으나, 태봉전투에서 패 배하고 안동이 불바다가 된 이후 곤경에 처 하게 되었다. 류인식은 자신이 처해 있던 당시를 ‘불행 하게도 신구 교체의 시기’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세계정세를 ‘약육강식 우승열 패의 대변국(大變局)’으로 진단하였다. 그리 고 스승에게 『주역』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 비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수시변역(隨時變易)’을 거론하며 유신할 것 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가 『주역』의 ‘수시 변역’을 사상변동의 논리로 삼았던 것은 박 은식의 경우와 같다. 협동학교를 건립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다 류인식의 생애와 활동에서 일대 전기를 이 룬 시기는 성균관에 유학하기 위해 상경하였 던 1903년경이다. 당시 서울에 체류 중이었 던 그는 신채호와의 만남을 통해서 개화사상 에 눈을 뜨게 되었고, 러일전쟁의 기운을 느 끼며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교육구 국운동을 실천적 지표로 설정하고 실행하였 던 것이다. 구국계몽운동가로 전환한 류인식은 1907 년에 안동 보수 유림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 쓰고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다. 협동학교 설립의 주역은 류인식과 일송 김동삼, 석주 이상룡 등이었다. 물론 의성 김씨와 고성 이 씨 문중의 진보적 변화와 참여가 학교 설립 에 큰 힘이 되었다. 설립 재원으로는 호계서 류인식 생가 터 등초본 대동사(이상 국가보훈부 제공)류인식의 저술 『대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