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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 이종암 · 엄순봉 · 이강훈 지사 61 도에 따라 그는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본 부가 있는 길림(吉林)으로 갔다. 김상윤(金相潤) · 이성 우(李成宇) 외 여러 명의 무관학교 동창생과 함께였 다. 그렇게 모인 10인 청년이 황상규(黃尙奎)의 지도 아래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였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은 총력을 기울여 국내 일 제기관 강습거사를 추진하였다. 주요 표적은 조선총 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세 곳이었다. 이종 암이 갖고 있던 3천원을 준비금으로 쾌척했고, 덕분 에 상해(上海)에서 폭탄 16개 제조용의 폭약 및 부속 품, 권총 2정, 탄환 100발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것 으로 시험제조한 폭탄 3개와 나머지 재료 및 무기류 전부를 국내로 밀송했다. 곡식 화물로 위장하여 중 국 안동현(安東縣)에서 탁송된 물건은 밀양의 동지 집과 경남 창원군 진영역 부근의 한 농가에 나누어 숨겼다. 아울러 단원 대부분이 밀입국해 서울의 북 촌 일대를 중심으로 은신 대기하였다. 이종암은 이 때 입국하지 않고 김원봉 · 강세우(姜世宇)와 함께 상 해에 남았다. 출옥 후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이 되어 있는 구영필로부터 7천원을 되돌려 받는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1920년 6월 중순부터 밀파단원 다수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속속 붙잡혀갔다. 누군 가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의 김태석(金泰錫) 경부에 게 거사계획을 밀고하고, 무기류는 핑계를 대어 내 주지 말도록 보관책임자에게 교사한 때문이었다. 거 사 결행을 독촉했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김원봉의 요청으로 이종암이 상황파악과 실행재촉을 위해 상 해를 떠났다. 7월 중순에 밀입국해 단원 다수의 피 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종암은 무기류의 인계를 보 관책임자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피신 중인 일부 단 원들을 규합해 본인이 거사를 실행하겠다는 의사 표 시와 함께였다. 하지만 보관책임자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종암은 최수봉(崔壽鳳)으로 하여금 1920년 12 월 27일에 밀양경찰서로 진입해 투탄거사를 성공시 다나카 기이치 처단 의거 당시의 상해 황포탄이종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