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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 가네코 후미코 · 후세 다쓰지 지사 61 일 ‘진재 중의 혼란을 틈타 제도(帝都, 도쿄) 대관 의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 비밀결사’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924년 1월 사건은 ‘대진 재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 즉 ‘대역 사건’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박열사건은 일본의 ‘4대 대역사건’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관동 대지진 중에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 단에 의해 희생당한 6천여명의 조선·중국인들의 학살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조작한 사건이다 천황제에 맞서 싸운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 일본 요코하마에서 부모의 천대와 무관심 속에 자란 가네코 후미코는 9세 때인 1912년부터 7년 간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현 세종특별 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의 고모부 집안에서 성장 하였다. 고리대금업과 아편 밀매로 조선 농민들을 착취하는 고모부 가족 밑에서 가정학대를 받은 그 녀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해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갖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무단 통치에 대한 반감, 권력에 대한 그녀의 저항의식은 1919년 3월 부강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크게 공감하면서 더욱 커졌다. 일본 도쿄로 돌아와 신문팔이와 식당 종업원으 로 고학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5월 흑도회 에서 의열활동을 펼치고 있던 박열과 만나 동지로 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인삼행상을 하며 고 학하는 박열을 도와 1922년 7월 10일 흑도회(黑濤 會) 기관지 『흑도(黑濤)』를 창간해 발행하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 응징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또 민중 의 직접행동 노선을 추구하는 고학생들과 함께 사 상단체 흑우회와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해 한인 노 동자 학살문제 등 항일행사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가네코 후미코의 활동은 박열의 항일 의열투쟁 과 관련이 깊다. 박열은 1922년 2월 중국 의열단에 서 파견된 최혁진을 만나 폭탄 유입문제를 논의하 였다. 상해(上海)에서 만들어진 폭탄으로 조선총독 부와 도쿄 왕궁을 동시에 파괴하려는 의열단의 대 규모 계획(일명 ‘제3차 폭동계획’)에 의해 폭탄을 나 눠 받기로 했던 것이다. 박열은 애초 이 계획을 가 네코 후미코에게 숨겼지만, 의열단의 국내 폭탄 수 취 책임자로 김한(金翰)이 선정되는 등 계획이 가시 화되자 1921년 10월 상의하였다. 박열은 1922년 가네코 후미코 공판정(公判廷) 전경(신문 게재) 공판장에서의 가네코 후미코(왼쪽)